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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궐리버 Mar 16. 2023

오늘 노을이 유난히 붉은 이유

Scarlet

나는 가사를 쓸 때 내 삶의 팔레트를 한번 펼쳐놓고 어떤 색깔이 담겨있는지 관찰해보곤 한다. 행복했던 하루에 담긴 내 감정의 색깔, 고단했던 하루에 담긴 내 감정의 색깔, 평범했던 하루에 담긴 내 감정의 색깔. 그렇게 하루하루를 떠올리며 나는 어떤 마음가짐이었는지, 어떤 모습이었는지 되돌아보면서 다채로운 색깔들로 팔레트를 채워본다. 하늘 아래 같은 색깔은 없다는 누군가의 말에, 역시 내 나날들은 엇비슷하면서도 묘하게 다를 때가 많다.


2014년, 나는 또래들과 비교했을 때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대학 입학 후 학업에 대한 회의감이 들 무렵, 1학년을 마치고 나는 무작정 휴학계를 내버렸다. 질풍노도의 시기가 늦게 찾아온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삐뚤어진 마음에 나쁜 길로 새었던 것은 아니고, 나는 잠시 1년의 시간 동안 남미로 새게 되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떠났던 것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도 있었고, 마침 그때 해외봉사라는 좋은 명분과 기회로 갓 성인이 된 내 청춘의 퍼즐 첫 조각을 바로잡아보고자 했던 것도 있었다.


스페인어를 하나도 모른 채 밟은 남미라는 대륙에서 나는 살아남기 위해 생존 스페인어를 몸으로 배웠고, 철자도 모르던 스페인어 단어들을 어쭙잖게 한글로 발음을 써 내려가며 문장을 만들었다. 그 문장은 현지인들에게 내 마음과 열정으로 번역되었고, 타지의 삶이 힘들고 지칠 때는 남미 친구들로부터 위로와 사랑이라는 마음들로 내게 다시 정의되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니 두루뭉술하게 표현된 서툰 내 진심들이 점점 명확해지며 남미에서의 삶은 또 다른 내 자아로서 그려졌다. 길다면 길었던 그 1년의 시간 동안의 나는 누군가에게 의미가 될 수 있었던 뜨거운 열정이 선명한 붉은 내 모습이었다.


'꼭 필요한 사람이 되자'라는 내 신조에 걸맞았던 2014년 한 해를 마무리하고 나는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뜨거운 열정을 가진 채로 나는 다시 혼돈의 시절로 돌아왔다. 스페인어를 까먹지 않기 위해 따로 공부도 하고, 남미에서 사귄 친구들과 소통하며 그때의 마음들을 계속 유지해 나갔다. 그렇게 나는 '처음과는 다르겠지' 하는 포부를 가지고 또 막연히 내 본래의 학업을 이어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지금으로서는 전혀 내 삶에 필요치 않은 것들을 내 머릿속에 툭툭 던져놓고 있었다. 지난날들로부터 물든 내 열정의 색깔은 다시 회의와 상실로 덧입혀져 점점 탁해져만 갔다. 나는 이러다가는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이 되겠다는 섣부른 망상들로 뒤덮인 채 충만했던 내 마음은 이내 앙상해졌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는 한껏 우울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짊어지고 하루하루를 살곤 했다. 그게 뭐가 그리 무겁던지 나는 고개를 한껏 들어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목이 뻐근했는지 뭔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본 적이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던 무미건조한 하루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때의 하늘은 너무나도 붉은 선홍색을 띤 노을로 채색되어 있었다. 이렇게 붉은 하늘을 본 적이 언제였을까, 잠시 감상에 젖다가 떠오른 어느 하루가 생각났다.


볼리비아 산타크루스에서 친구들과 본 하늘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무엇을 할 거냐'고 하던 한 친구의 질문에 나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뭐든 내가 꿈꾸었던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대답을 했던 것 같다. 두루뭉술한 대답이었지만, 당시 나는 사실 그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노을이 너무 예뻤고, 그 무더운 여름-계절상 여름은 아니었지만 여름같이 항상 더웠던-날 저녁의 선선한 바람이 상쾌하게 살랑이고 있었다. 저녁 준비로 분주했던 주방에서 흘러오는 음식 냄새와, 넓은 잔디밭에 우두커니 서있던 이름 모를 꽃나무의 조화가 너무 아름다웠다. 그렇게 또박또박 스페인어로 대답했던 그 두루뭉술한 대답에서 나는 과거도 미래도 생각하지 않았던, 오롯이 현재에만 집중했던 내가 떠올랐다.


모든 색이 뒤섞이면 검은색이 되듯이, 한국에서의 나는 온갖 복잡한 마음들이 뒤섞여 우중충한 색깔을 내비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선홍빛으로 물든 하늘을 본 그날의 나는 은연중에 내 정신없는 마음들을 내려놓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랬으니 나는 무거워 버티지 못하고 그 마음을 잠깐 내려둔 채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세상에 필요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겠다는 다짐은 내게 부담이었고, 매번 빛나고 뜨거울 것만 같았던 나는 가끔은 그것이 식을 때도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그럴 땐 가끔은 모든 걸 내려놓고 잠깐 기지개라도 켜면서 짓눌린 어깨를 펴줘야 하기도 하고, 여태껏 너무 달려왔다면 잠깐 쉬어가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외려 한 치 앞도 모르는 내 불안한 미래만 바라보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충분히 뜨겁게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남미에서 느꼈던 또 다른 내 자아에는 삶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나는 겪지도 않은 먼 미래를 예단하지 않고, 지금의 나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충분히 다채로운 빛을 내는 사람이다. 어떨 때는 푸른빛을 내고, 어떨 때는 붉은빛을 내고, 어떨 때는 어두운 빛, 또 어떨 때는 무채색의 빛. 그때그때의 프리즘에 투영된 나는 형형색색의 빛을 뿜어낸다. 붉은 노을이 지는 이유는 머리 위에 있던 해가 옆으로 기울면서 햇빛이 대기권을 길게 지나오는데, 그때 먼저 산란되는 파란색은 사라지고 마지막에 남는 붉은색이 남아 우리 눈앞에서 산란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오늘 나의 하늘에서 노을이 유난히 붉은 이유는 그런 과학적인 원리보담도, 잊고 살았던 내 뜨거운 마음이 떠오를 때이기 때문이다. 걱정으로 뒤덮인 내일의 하늘 말고, 잘 살아낸 오늘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잘 살아냈던 그때의 하늘을 한 번 떠올려보길 바라며.




https://youtu.be/Jj7J7tSozuY


Scarlet


추억에 색깔이 있다면 선홍빛 노을 같을 거야

위태로운 내 하루가 저물 때면

한창 뜨거웠던 그때 하늘이 보여

너의 눈에 비치는 나의 모습이

항상 행복했음 좋겠을 때야


찬란하지는 않아 지금은 그냥 초라할 뿐야

이젠 잊지 못할 것들이 옅어질 때야

가끔 뜨거운 가슴이 주첼 못할 땐

창밖의 하늘은 붉게 타오를 거야


찬란하지는 않아 지금은 그냥 초라할 뿐야

이젠 잊지 못할 것들이 옅어질 때야

가끔 빛났던 두 눈이 빛바래 갈 땐

선홍빛 노을은 낭만적일 거야


너의 맘에 새겨진 우리 색깔이

변하지 않았음 좋겠을 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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