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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얏 Oct 21. 2022

서울 나들이 6


퓰리처상 사진전. 


전시를 봤다. 가끔씩 전시를 보곤 하는데, 인상이 깊었던 전시는 몇 없었다. 다만 전시에서 어떤 작품이 인상이 깊었나를 꼽자면 한두 개가 떠오르기는 하다.


 오늘은 한 장의 사진 앞에서 눈물이 났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졌다. 책을 네 권 샀다. 내 주변을 끊임없이 서성거리던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을 이제야 곁에 둬 보기로 했다. 2년 전부터 간헐적으로 나에게 암시를 주던 쿤데라의 [농담]도 샀다. 나머지 두 권은 충동적인 이끌림에 샀는데,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는 어제 카페에 들렸을 때 꽂혀 있던 책이었다. 나는 이 책을 보자마자 [모래밭]을 떠올렸고, 동시에 전혀 상관이 없던 사건들이 어떤 우연에 의해 일련의 충돌을 겪는 그런 계시(그러나 미약한)가 느껴져 바로 읽어 보고 싶어졌다. 또, 조셉 콘레드의 [암흑의 핵심]은 내가 생각하는 암흑의 핵심과 얼마나 고유한 본질을 맞다투고 있는지 호기심에 샀다.


 무척 바쁠 것 같았던 오늘의 산책은 다소 평이하게 집으로 흘러들어 왔다. 본래 계획은 다큐영화제를 보러가려고 했으나, 마음에 드는 작품이 오늘은 예정에 없었다. 내일과 모레의 치밀하지 않지만 그래도 잡혀 있는 산책 계획을 세워봄이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한 남자를 만났다. 오늘 하루에 가장 인상 깊었고, 앞으로도 내 기억 속에서 살아 있을 이 남자의 이름은 케빈 카터다.


 내가 뭔가를 안다고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과연 나는 무엇을 안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태어나 지금까지 뭔가를 진실로 알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진심을 다해 뭔가를 알고 있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진을 모르고, 문학을 모르고, 예술을 모르고, 철학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감추려는 '거짓'을 꽤 잘 감지한다.


 사진전에 가면서 문득 들었던 생각은, 나는 사진을 뭐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전에 사진전에 갔던 적이 있었다. 친구 A와 친구 B, 그리고 A의 여자친구와 동행했던 전시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두 장의 사진 앞에서 울었었다. 그 인상 깊었던 푼크툼(롤랑 바르트를 아직 제대로 만나보질 않았지만, 그의 용어는 유용하다), 나는 그 깊은 구멍 앞에서 시공간을 무너뜨리는 어떤 슬픔을 느꼈었다. 그리고 동시에 떠올랐던 사진에 대한 고유한 본질. 그것은 내가 끊임없이 경계하는 고정된 이미지였다. 정지하고 멈춰버린 순간의 포착은, 이미 죽어버린 기억을 붙잡고 있는 어떤 이질적인 움직임이다. 그때 나는 사진을 꽤 부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퓰리처상 사진전은 우리 분단국가의 아물 수 없는 상처인 6.25 전쟁, 당시의 사진들로 구성된 전시와 연도별로 기획된 전시로 분류되어 있었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6.25 전쟁 사진전을 먼저 봤다. 사진전에 들어서며 가장 먼저 접할 수밖에 없었던 전시의 초점은 바로 사진을 찍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카메라의 렌즈가 담아낸 장면들을 따라가지만, 그 렌즈는 사진사의 눈을 따라가게 되어 있고, 그래서 나의 초점은 사진사의 초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첫 작품을 보았을 때, 불과 2시간 전에 서점에서 만났던 청소부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요즘 사람들은 배고픔을 몰라서 음료도 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버리고 간다. 치우는 게 몹시 피곤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배고팠던 세대를 상상하며, 배고프지도 않고- 중산층의 부유함으로 해외 여행을 쏘다니는 젊은이들을 떠올리고, 이 젊은이들이 자라버린 세대를 상상했다. 이 상상은, 전시를 거의 다 볼 때 치밀어 올랐던 정신적 구토에 연연했다. 좀 더 사진다운 사진은, 여지가 남아 있다. 그 여지를 통해 사진이 가둬놓고 있는 장면의 전후 운동성이 되살아난다. 인간의 상상력과 사진의 여지가 만나면, 하나의 이야기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결국 사진으로부터 영사映寫되어 되풀이되는 어떤 반복이다. 한 장의 사진 속에 어떤 크기의 역사가 들어갈 수 있는지, 혹은 더욱 사실적으로 되풀이될 수 있는지. 이런 생각들을 떠올리며 전쟁의 사진들을 봤다.


 잔해와 내려앉은 전신주, 총알과 파편으로 깨져버린 건물의 창들. 시가지의 전투 장면은 실로 어마어마한 순간들을 담아내고 있다. 병사는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맞닥뜨릴 복장을 하고 있고, 그런 복장을 한 병사들이 서로를 겨누고- 포로를 끌고가고- 사형 집행을 하고. 전투 중 갑작스런 폭우로 맺어진 정적에 고요한 단잠을 이루기도 한다. 전쟁 중 찾아오는 평화에 대해 글을 썼던 기억이 났다. 포탄이 날아오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찢어질 듯 날아오는 굉음, 그리고 이명. 전쟁 한복판 속에서 각자에게 나타나는 사적인 평화를 나는 어떻게 어렴풋이 알았을까. 그건 침묵의 포옹이었는데.


 사진을 보면서 섬뜩했던 한 가지는, 피난민의 사진 중에 유독 젊은 여자는 잘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젊은 남자는 병사가 되고, 남은 가족들- 아이들과 어머니. 노인들과 약자들이 오르는 피난길에 젊은 여자가 보이질 않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건만. 사진사들은 언론인이고,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찍었던 사진들은 모두가 역사적 사건들의 중심에 놓여 있는 순간들이었고, 그들 또한 사진을 찍기 위해 그 순간에 가담해야 했으리라. 그래서 나는 이제껏 '사진'에서 알지 못했던 것을 느꼈다. 6.25 전쟁 사진을 담아냈던 사람은 미국인이다. 이 미국인은, 미국군과 함께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퓰리처상 사진전에 전시되는 사진들- 주로 미국에서 찍힌 인종차별에 관한. 그리고 인종차별에 관한 각국의 사건들. 대통령의 암살, 일본과의 전쟁, 베트남에서의 전쟁, 중동에서의 남미에서의. 내가 사진전을 계속 보면서 느꼈던 거북함의 정체는- 이곳에 걸린 사진들은 강렬한 푼크툼을 만들어내기도 하면서, 또는 긴박함, 절박함, 죽음의 엄습, 전쟁의 참혹함, 쓸쓸함, 잔혹함과 처절함을- 그리고 어떤 승리를, 압도적인 감동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 자아내는 여지들 뒤편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희망'이다.


 이 '희망'은 6.25 전쟁 당시 사진을 찍은 사람이 미국인이라는 것과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 그에게는, 전쟁 초반 밀려오는 북한군에 총살당하며 목숨을 걸고 피난을 떠나는 남한 사람들의 시선이 없다. 혹은, 미국군의 개입으로 포로가 되고 다시 밀려 올라가며 후퇴와 죽음을 직면하는 북한 사람들의 시선 또한 없다. 이게 6.25 전쟁 사진 뿐만이었을까. 이 거북함은 퓰리처상 사진들 전반에 걸쳐져 있었다. 쉽게 말해 어떤 '순간'을 담아내기 위해 사진사들이 목숨을 걸고서- 사명을 다하며 그 순간으로 다가간다 하더라도. 담아낼 수 있는 사진과 결코 사진으로 찍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이 거북함을 갖고서 전시를 보다가 만난 '케빈 카터'의 사진 한 장 앞에서 나는 울고 말았다. 그는 내가 말하는 뒤에 감춰진 '어떤 희망'의 이면을 보여줬다. 그가 사진으로 보여주지 못한 여지는 그의 생으로 확장되어, 죽음이라는 거대한 구멍과 함께 무엇인가 보여주고야 말았다. "아이를 안아주지 못해 너무나, 너무나 미안했다"고 그는 말했다.


 전시를 보면 산책이 사적인 집착이 되는 것 같다. 요설을 쏟아낸 것만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노트에 사진에 대한, 사진사에 대한, 그리고 사진을 보는 것에 대한 온갖 상념들을 한풀이하듯 써놨던 것 같다. 표를 사고 보는 사진들의 여지들. 나는 자주 이 관계들이 의심스럽다. 전쟁의 순간을 표를 사고 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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