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나에게서 멀어졌을까? '나'를 잃어버린 시대

250522 종교현상학 - 김재영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1)

by 김희우

물질적 풍요와 지식의 홍수 속에서도 많은 이들이 삶의 깊은 단절감, 즉 '소외'를 느낀다. 이는 단순히 사회 구조의 문제일까, 아니면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결핍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폴 틸리히(Paul Tillich)와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라는 두 사상가의 통찰을 빌려 현대인의 소외를 심층적으로 탐구하고, 그 극복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틸리히는 소외를 '존재의 근원(Ground of Being)'과의 단절에서 비롯된 실존적인 문제로 파악한다. 인간은 자신의 근원, 즉 궁극적 실재로부터 멀어지면서 불안과 상실감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치즘과 세계 대전과 같은 거대한 비극을 목격하며, 그는 인간이 삶과 타인에게서 멀어지고 결국 자신마저 낯설게 느끼는 현상을 '존재론적 단절'의 결과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소외는 단순히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피할 수 없는 '기반(foundation)'이 된다. 그의 시선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신의 은총(Grace)'이라는 외부로부터의 개입을 통해서만 이 단절이 치유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프롬은 소외를 '사회심리적' 문제로 해석한다. 그는 자본주의 생산 방식과 계급 형성으로 인해 인간이 노동, 타인,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된다고 보았다. 즉, 소외는 개인의 자기 인식으로 인해 자연과 사회로부터 멀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프롬은 자아 성찰, 사랑, 그리고 생산적인 삶을 통해 이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인간 내면의 생산성과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며, 구원을 타락으로부터의 회복이 아닌 '새로운 창조'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는 마르크스처럼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큰 비중을 두면서도, 사회적 병리가 개인의 성격 구조에 어떻게 발현되는지에 주목했다.



틸리히와 프롬은 모두 인간이 '근본적으로 소외된 존재'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소외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한 관점은 극명하게 갈린다. 프롬이 사회적 조건의 변화와 심리치유를 강조하며 인간의 '행위자(active agent)'적 역할을 중요시하는 반면, 틸리히는 인간의 한계를 철저히 인정하고 '은총을 받아들이는 수용자(passive recipient)'로서 존재의 근원과의 화해를 통해 소외가 극복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프롬에게 구원이 '인간다움을 향한 자기 창조'라면, 틸리히에게는 '존재 자체와의 화해', 즉 마치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 듯한 '부활'에 가깝다.



이러한 차이는 현대사회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우리는 유한한 대상들, 즉 돈, 권력, 명예 등에 집착하며 삶의 공허함을 채우려 하지만, 폴 틸리히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했듯이 "하나의 대상에서 또 다른 대상으로 옮겨 다니며, 우리의 근원이며 존재의 뿌리이신 분과의 관계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한 채 남는다." 진정한 만족은 '존재의 근원'과의 실존적 관계 회복에서만 온다는 통찰은, 현대인의 무한한 갈망이 유한한 것으로 채워질 수 없다는 냉철한 현실을 일깨운다.



궁극적으로 소외 문제는 단순히 심리학이나 사회학의 영역을 넘어선다. 틸리히의 주장처럼,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소외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될 수 없다. 우리의 '믿음'은 이성을 넘어서는 삶의 근원적인 구조이며, 심지어 무신론조차도 특정 믿음 위에 서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껍데기뿐인 성취나 임시방편적인 만족이 아니다. 이는 '존재의 근원'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만 채워질 수 있는 갈증이며,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궁극적인 것을 향해 열린 자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현대인의 소외는 우리가 진정 누구이며, 무엇을 갈망하는지 되묻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이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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