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양성평등
“아빠. 유치원 친구가 내 물통이 핑크색이라고 여자라고 놀렸어요. 이제 핑크색 물통은 쓰기 싫어요.”
산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아이가 남편에게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아이의 유치원에 매일 물통과 수저통을 가져가는데, 핑크 물통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다는 거다.
사실 내가 핑크 물통을 살 때 남편이 ‘남자아이인데 괜히 핑크 물통 사는 거 아니야?’ 걱정을 하긴 했었다.
나는 그때 더 당당히 “원래 남자는 핑크야! 뭔 소리야.” 주장하며 아무렇지 않게 물통을 샀었고, 아이는 역시나 내가 싸준 핑크 물통을 들고 다녔더랬다.
그런데 그 물통이 놀림거리의 대상이 되었다니!
아이의 말을 듣자 아이를 놀린 그 친구에게 화가 부럭 났다. 나는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너는 거기에다 대고 뭐라고 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다음에도 그렇게 놀리면 핑크 색도 남자의 색이 될 수 있다고 그 친구에게 꼭 말해줘! “
장난스레 아이에게 말을 하고 난 뒤 다시 길을 걷는데 괜히 찝찝해졌다.
남편의 말대로 파란 물통을 사줬어야 했나? 처음엔 그 물통을 사준 나를 탓했고 나중엔 벌써부터 이런 걸로 놀리고 놀림을 받다니. 나는 부모로서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나. 와 같은. 걱정이 들었다.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임신을 한 순간부터 나는 내 아이를 남녀 구분 없이 키울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일부러 아이의 이름도 중성적으로 지었고, 아이의 신생아 옷을 살 때도 파랑보다는 일부러 더 베이지나 노랑을 골랐었다.
내 아이는 남자라는 틀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길 바랐다. 이 넓은 세상 젠더의 틀에 갇혀 있지 않고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길 바랐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고 키우기 시작하면서 어쩌면 이 아이의 유전자에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남자’의 기질이 아주 단단히 박혀 있구나. 깨닫는 순간들이 늘어났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할 때부터 아이의 손에는 덤프트럭, 크레인과 같은 자동차 장난감이 쥐어져 있었고 4살이 되자마자 헬로카봇 장난감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5살이 넘어가자 나보다 더 로봇 장난감 조립을 잘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조립 설명서 없이도 혼자 처음 보는 로봇을 뚝딱뚝딱 만들기 시작했다.
행동도 그랬다. 아이는 걷기 시작하자마자 뛰기 시작하였고, 무조건 높은 곳만 보이면 올라가려고 하였다. 당연히 높은 곳에 올라가면 뛰어내렸다. 모래 놀이를 하더라도 꼭 전쟁놀이를 하였고, 여자 친구들과 소꿉놀이를 할 때면 꼭 일을 하러 나가는 아빠 역할을 하였다. 아빠 아니면 아기 그것도 아니면 강아지였다. 아이는 자신이 엄마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을, 혹은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아빠가 있다는 생각 하진 못하였다.
아이가 커가면서 남녀가 가지는 ‘다름‘과 더불어 ’ 다르지 않음‘ 에 대해 알려줘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다. 단순히 여자 색상, 남자 색상을 벗어나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이 아이에게 그대로 이어질까 두려운 마음도 든다. 그때마다 아이에게 내가 잘 알려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 괜히 아쉽다.
남편과 상의한 뒤 더 이상 아이의 유치원 가방에 핑크색 물통을 넣지 않기로 했다. 대신 아이에게 핑크색 물통은 원한다면 언제든지 쓸 수 있다고, 색상으로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다고 정확히 말해주었다. 내 말에 아들은 그저 알겠다고만 하였다.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참.)
뭔가 내가 얼굴도 모르는 그 꼬맹이에게 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지만 나의 욕심 때문에 아이가 상처받는 것은 싫었다. 대신 이제 조금씩 우리 가족이 성교육에 대해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다름‘은 무엇인지 또한 ’ 다르지 않음‘은 무엇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