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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색무취 Oct 23. 2023

중년에 읽는 톨스토이 인생론 (6)

3. 현대인에게 나타난 의식의 분열

    언제부턴가 사회에서 따뜻함이 사라져 버렸다.


    오염된 시각을 갖게 된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전쟁터에서 생명을 잃는 사람들을 생각하기 이전에, 이 전쟁의 배후엔 누가 있을까 그리고 이득을 보는 쪽은 어디일까부터 생각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패권을 유지하려는 대서양 세력의 계략인지, 패권에 도전하려는 유라시아 세력의 작품인지 따위에 대한 생각에 매일 발표되는 사망자 숫자에 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인공지능을 이야기 할 때 Man like machine 보다 machine like man 이란 어구에 더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내 스스로가 그렇게 변해 왔으므로. 공감 능력을 잃고, 사회가 요구하는 냉랭함을 갖추며 오직 나 자신만의 일상을 기계처럼 살아가는 나는 인간이라 부를 수 잇는 존재일까.   


    내가 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살고 있는 동안 나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했을 때 그것을 얻고 나더라도 그 마음은 온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신분이 해결되었을 때도, 집을 샀을 때도, 직장을 옮겼을 때도, 그 순간 뿐이었다. 

늘 채울 수 없는 무언가를 채우려는 헛된 노력을 위해 살아야만 하는 것이 인생인 걸까. 




'...나는 행복을 원하고, 삶을 바라고, 합리적 의미를 원한다. 그런데 나 속에도, 나를 에워싼 일체의 것 속에도, 있는 것이라곤 오직 악, 죽음, 무의미 뿐이다. 어찌하면 좋을까? 무엇을 하면 좋을까? -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없는 것이다.'


    봄날의 싱그러움과 기쁨을 보내고, 이미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가을의 일상을 살아내며 무덤덤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 마음이 뭉클해졌고 새로운 장난감을 받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던 어린 아이의 마음은 왜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인가.  


'인간의 생활이란 그 출생과 더불어 시작되는 개인적 생활에 지나지 않는다는 신념을 증명해 주는 현대 세계의 그릇된 속에서 키워져 자라온 인간은, 그가 갓난 아이였고 어린이였던 시대에도 생활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들고, 그 뒤 어른이 되고 천년이 되었을 때도 그 동안 끊임없이 생활해 왔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삶이 언젠간 끝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부터 소년은 숫자를 세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제까지 몇 년을 살았고, 앞으로 몇 년을 더 살 거라고 생각하며 앞으로 몇 년 뒤에는 무엇을 할까 하는 바램과 함께 숫자를 머릿속에 계속 되뇌었었다. 


    숫자가 주인이 되어 삶을 갉아먹기 시작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청년이 되어 이미 지쳐버린 소년의 마음 속에 이 한 가지의 울림이 찾아왔다. '백 년 아니 천 년 이전에 나의 생명은 존재했던 것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그렇지 않다라고 생각해야 할까...' 태어나기 이전의 내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 순간 일상을 살아가는 나 자신은 유일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 마음 때문에 현대인은 역사상 그 어느 때의 사람들보다도 자기애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죽음이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완전한 끝이기 때문에.   


    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결정되어 있었다면, 태어나기 이전에도 나의 생명 혹은 그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본다면? 이 시선에서 바라보았을 때 삶과 죽음을 대하는 마음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자기의 합리적 의식에 관해서 스스로 물을 때 인간은 결코 합리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어느 해 어느 달에 출생하신 자기 부모의 자식이며, 조부모로서의 자손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늘 자신을 하나의 자식으로서가 아니라, 때로는 수천년의 옛적에 이 세계의 다른 끝에 살고 있던 합리적 존재, 즉 시간과 장소의 관계로는 그에게 전혀 낯선 존재의 의식과 하나로 융합되는 것으로써 인식하는 것이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합리적 의식은 조금 모호하게 들린다.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가치 혹은 생명의 움직임이라 이해해야 할까. 다만 한 가지 느낄 수 있는 것은, 나의 생명을 지금의 나에 전부 투영하여 생각하지 않을 때 죽음의 공포와 지나친 자기애는 줄어들며 삶의 목표가 많이 달라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새로운 일을 배우고 깨어 있는 시간 내내 일을 하며 발버둥치는 몇 달간의 시간을 보내었다. 더 잘 살아보려 허우적대는 지금의 내 행위는 과연 가치가 있는가?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이 매일 밤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 어차피 내가 죽고 나면 무의미해 질 텐데? 

    - 아니 내 노력의 결과로 덜 고생하면서 살 자식들이 있지 않아?

    - 그 자식들도 언젠가는 세상을 떠날 것 아닌가?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다고 보는가?

    -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렇게 맺어진 인연이라면 그 관계만큼은 영원할 수 있지 않은가? 

    - 그렇게 생각한다면 세상 많은 인연들에게 더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나... 가족 이외의 사람들에게도.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다만 죽음 너머 있을 지 모를 무언가, 잡히지 않을 듯한 영원을 바라보았을 때 마음이 더 따뜻해지는 것 만은 확실해 보였다. 나에게서 가족으로,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에게로 얼어 있던 마음이 아주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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