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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 Aug 28. 2022

존재의 불안, 불안의 존재

우리는 존재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얼마나 불안에 떨고 있는지요

손가락을 코 아래 대어보십시다. 숨이 느껴지던가요?

그러면, 당신은 지금 살아 있습니까?


숨이 붙어 있다. 들숨과 날숨이 나의 손끝에서 느껴진다. 그럼에도 가끔 진정 살아 있느냐고 내게 묻는다. '진정' 살아 있느냐고 묻는다. 어떠한 의지에 의해 발현한 생각이 아니었다. 심연에서 보글보글 끓던 것이 문득 튀어올랐다. 내가 진짜로 살아 있는 것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지금까지 제 몸집을 잘만 숨겨오던 질문이 실체를 드러내자 나의 일상에 자연스럽게도 스며들었다. 덕분에 내 손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나는 삶을 덧붙여 반문해야만 했다. 그렇게 스며들었던 질문은 점점 몸집을 키워갔다. 결국 그 자체로 나에게 큰 숙제가 되었다.


바람이 살랑이던 날이 있었다. 같이 느껴보자. 5월쯤? 초여름 날씨였다. 멋들어지게 푸릇푸릇한 나무들이 일렬로 서 있었고, 자연스럽게 부는 바람에 그들과 나는 머릿결을 같이 했다. 좋아하는 내 샴푸 향기가 찰랑거릴 때, 높은 건물 뒤에 숨었던 해가 드러났다. 헤드폰에서 나오고 있던 내가 좋아하는 팝송은 때마침 클라이맥스였다. 걷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지려고 했다. 터진 건 웃음이 아니라, 엉뚱한 생각이었다.

죽음.

내가 이 순간 죽는다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려고 한 생각이 아니었다. 우울하지도 않았다. 기분이 참 맑았는데, 그렇게 구름 한 점 없는 기분에 통통통, 쉭쉭쉭 별똥별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사마귀가 느끼는 기분일까. 수컷 사마귀의 기분. 짝짓기 후 죽는 기분. 나의 맑은 쾌락은 나를 참 기분 좋게 했으나 그 순간 삶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하게 했다. 생각해보면 연인과의 관계도 아름다운 기억의 종결로 점찍는 비결이 애틋함인 거 같다. 심지어는 가족마저도. 왜 모든 기억은 그렇게 적절한 절정에서 매듭짓는 것이 아름다워 보이곤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내가 지독한 회피주의인가 싶기도 했다. 온전히 무언가를 즐겨내고 보내줄 자신이 없는 것인가 싶었다.


왜?


키르케고르의 책을 읽었다. 정확히 말하면 키르케고르의 철학을 다루는 책을 읽었다. 그 책에서 나는 질문에 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자신감을 발견했다. 동시에 나약함을 발견했다. 심미주의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읽었다. 자아가 없는 삶이라고 그러더라. 오만하게도 가끔 내가 다른 사람들을 보며 했던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죽기 직전까지 자기 자신을 누군가와 비교하며 살아간다. 타인이 정한 기준에 등급을 매겨 나를 포함해 모든 이들을 그 안에 구겨 넣는다. 그리고 그 기준에 의해 정해진 자신의 등급을 올리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간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는 것을 차치하고 사회적으로 괜찮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러다 보면 아마 괜찮은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본인 눈에 모든 사람이 급 매겨진 NPC로 보이는 저주에 걸린 것 빼고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사회적 기준이라는 게 싹 사라지면 어떨까도 생각해봤다. 그들을 구성하는 뼈대가 그것이었을 텐데 그것들이 사라진다면? 그들은 자신을 어떻게 정의 내릴까? 정의 내리는데 실패한 자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자신이 가진 외제차가 껌값인 사회가 된다면? 직업의 귀천이 단 하나도 없는 사회가 된다면? 모든 사람이 장님인 사회가 된다면? 그래서 외모에 대한 기준도 사라져 버린다면? 목소리만 남는다면? 그조차 사라져 활자만 남는다면? 악착같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아의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회에서조차 룰을 만들려 노력할 것 같았다. 그들의 그러한 심미적 기준들이 인간을 복잡하고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했던 내가 책을 읽으며 웃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나도 심미주의자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쾌락에 집중하는 인간. 나는 그러면 어떠한 쾌락에 집중해 있었을까? 나의 이러한 깊은 사고, 키르케고르의 책을 읽으며 할 수 있는 대화 속에서 느끼는 섬세함...... 이런 것이 나를 구성하는 쾌락이고, 이것을 키르케고르는 귀족적 심미주의라고 하였다. 원초적 심미주의인 사람들을 하등 미개하게 바라보면서 자신의 쾌락만은 상위의 것으로 취급하는 사고 말이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권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삶의 연속에서 문득 느끼던 권태가 아마 나의 무의식이 은연중에 갖고 있던 회의 아니었을까. 깊은 회의가 삶의 끝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삶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내가 발견하지 못한 나의 깊은 회의였던 것이다. 그것이 권태로 드러나다가, 가장 권태롭지 않으며 동시에 가장 권태롭던 평화의 시기에 불쑥 포장지를 찢은 것이다.


권태의 순간과 죽음에 대한 사유가 무슨 상관일까.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다. 권태의 기원은 선택지의 발현이다. 인간은 자신이 자유를 손에 쥐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권태를 느낀다. 권태는 하나의 불안이다. 내가 나를 만들어갈 수 있음에 희열을 느낌과 동시에 미래에서 지금의 나를 기다리는 '미래의 나'를 내가 만들어야만 한다는 무게감이 주는 불안을 느낀다. 이는 자유에 대한 공포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삶, 즉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우리가 자유로운 생명체라는 것을 인지하게 만든다. 그것은 곧 자유에 대한 공포라고 부를 수 있는 불안을 가지고 온다. 이때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일을 선택하는 인간과, 어떠한 것을 선택하는 인간은 결국 모두 선택이라는 책임을 지게 된다. 어찌 되었든 말이다. 그 순간이 주는 공포를 피하고 싶은 욕구가 나른한 자아를 '무'로 던져버리고 싶도록 만드는 것이다.


아아. 우리는 그렇게 항상 불안에 떨면서 살고 있는 거였구나. 불안이 어떠한 형태로 드러나는 것인지는 정해진 바 없지만, 여하튼 우리는 불안한 생명체임이 틀림없다. 그 불안을 덜어보려 선택한 것이 하나의 기준들에 자아를 의탁하는 것이겠구나. 자유를 버리고 미래의 자아와 노력의 결실을 선형적으로 만들어 모든 결과가 모든 선택들에 비례하도록 하고, 그를 통해 나의 책임을 덜고, 나의 불안을 덜어버리려고 하는구나.


나를 판단하는 수많은 시선은 나를 참 불편하게 했다. 나를 어딘가에 속하게 하려는 손길들을 쳐냈다. '나'를 구성하는 것이 '나'일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그래서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고유한 인간이 되어 결코 아무에게도 섣불리 판단되고 재단되지 않도록, 아주 또라이가 되어버려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사는 것이 불안한 인간임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죽을 때가 되어서, 만약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때가 되어서 진짜 가벼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결국 숨 붙어 있는 동안엔 결코 가벼울 수 없을 것이다.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자신의 무거움을 자가와 자차, 번듯한 직업 혹은 학벌에 덜어둔 사람조차도 결국 자유에 발 묶인 헬륨 풍선에 불과할 뿐이다.


'너는 결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위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당신이 불안함을 인지하는 순간이 오거든, 자연스럽게 유영하라는 이야기이다. 우리 모두의 심연은 자유이다. 즉, 가능성에 대한 의식이고, 그것을 우리는 불안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불안하기에 인간이니,

인간이기에 불안하다.

불안정하다.

불완전하다.

'不'

인간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글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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