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전 하루 연차를 내고 아침 늦게까지 늦잠을 즐겼다. 평소라면 출근하자마자 내린 커피 한 잔을 비우고 두 잔째를 채우러 갈 시간에, 알람소리 없이 자연스레 눈이 뜨였다. 일어나서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창문을 열었다. 불시에 파고드는 차가운 가을바람과, 평소보다 유난히 높은 구름.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얼마 전까지 기승을 부리던 늦더위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춥다고 느껴질 정도로, 생각보다 차가운 공기에 가디건을 대충 걸치고 거실로 도망쳐 냉장고를 열었다. 어젯밤에 마시다가 조금 남았던 감주를 마저 꺼내 얼음을 동동 띄워 마신 한 모금은 여전히 달콤시원했다.
책상에는 새벽까지 쓰던 에세이 노트와, 그 위로 펜이 어젯밤 잠들기 전에 정리한 그대로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 옆으로 작은 커피 잔이, 믹스 세 개와 함께 고민의 흔적으로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렇지──,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모처럼의 연차이기도 하니, 하루는 읽고 쓰는 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집 앞의 카페로 나와, 노트북을 펴고 어제의 연장전을 시작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애초에 내가 지금 어른을 논할 수 있기는 한걸까 싶지만서도, 그렇게 생각하면 언제까지고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기회라고 생각해, 이참에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마침표 하나 정도 찍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이 주제에 대해 계속 쓰기로 했다.
내려다 보며 쓰는 어른에 대해서가 아닌, 올려다 보며 쓰는 어른에 대해서.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
예전에는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했던 것. 지금은 되고 싶지 않지만 되어가고 있는 것. 그러나 그건 죽음과는 다르게,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아득한 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어른스러움’이라는 개념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른’이라는 한 단어로 규정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게 과연 있기는 한 걸까.
이 주제에 대해 처음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 브레인스토밍의 시작은 주변으로부터 어른이라는 이미지에 따라 강요 받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본적이나 들은 적이 있었냐는 것이었다. 글쎄──, 전세계 인구 전부를 정말 하나하나 꼼꼼하고 세밀하게 조사한다면, 한 두 명 정도는 존재할지도 모르겠지만, 간단히 생각해봐도 세계 4대 성인을 제외하고는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성인으로 추앙받는 네 명 조차도 완벽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간단히 말해, 어린 시절에 어른이라고 생각했었던 사람들이 더 이상 어른이라고 여겨지지 않게 된 순간부터 저 단어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기습적으로 주변으로부터 ‘너도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라는 말을 들으면 내심 흠짓 놀라서는 ‘아, 그런 건가. 난 이미 어른 같은 게 되버리고 만건가?’ 하고는 아주 잠깐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하기야 뭐, 그럴 리가 없잖아 이 멍청아.
그렇지만 어른이라는 개념은 아주 어릴 적에, 그러니까 학교 선생님을 올려다 봐야 했을 시절에는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단순 했었다. 동경의 대상이었다고 해야 할까. 이를 테면,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프로야구에 관심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든 사람들이 모였을 때는 야구에 대한 얘기가 빠지는 법이 없었다. 모두가 각각 응원하는 팀이 있었고, 팀의 승패에 일희일비하는 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이가 들면 모두 그렇게 되는 것 같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러나 여전히 야구라는 스포츠에 전혀 관심이 없는 상태로, 주변에서 야구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아직도 전혀 알 수가 없다.
야구라는 스포츠를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저 관심이 없을 뿐으로, 야구라는 스포츠가 한 팀이 몇 명으로 구성되는지, 혹은 몇 회로 구성되고 경기 내부에 어떤 규칙들이 있는지, 어제 어떤 팀들이 경기를 했고 누가 이겼는지 정도는 뉴스에서도 그렇고 선배들도 그렇고 이곳 저곳으로부터 반복적으로 듣다보니 알게 되지만, 그 뿐이다. 요컨대 올 시즌에 두산과 기아가 나란히 1위를 달리는 가운데 그 뒤를 롯데가 2위로 바짝 추격하고 있다는 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된 것들이고, 그 경기 내용들에 대해서는 글쎄──,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가끔 야구장에 가자고 하면 그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 있고 싶어 갈 뿐이지, 사실 승부의 행방이든, 누구를 응원하든 내겐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문제라면 문제일수도 있겠지만, 뭐──,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게, 나중에 혹여나 드라마 시간에 프로야구를 보겠다고 리모컨을 두고 부부싸움을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씀바귀를 잘 먹을 수 있게 될 줄 알았다. 어쩜 저렇게 쓴 음식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삼킬 수 있는 걸까. 가끔씩 식탁에 오르는 씀바귀가 줄어드는 모습을 볼 때다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감기약도 삼키는 게 힘들었던 당시의 나로써는 약을 제외하고 쓴 맛이 나는 음식이라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감기약 정도는 문제없이 삼킬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씀바귀는 엄두가 나질 않는 걸 보니 아직도 어른이라는 게 되려면 멀었다고 생각한다.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뜨거운 걸 시원하다고 말하게 되는 줄 알았다. 가끔 온천에 가면 어른들은 항상 온탕에서 시원하다며 들어오라고 손짓했지만 체온보다도 눈금이 한참이나 올라가있는 온도계를 보면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쯤은 당연히 알 수 있었다. 그때는 아무도 없는 냉탕에서 첨벙거리며 신나게 놀았었는데, 사실 이 부분은 이제야 조금 이해되기 시작했다고 할까. 지난번 온천 여행에서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있자니 뭉친 근육이 스르르 풀려버리는 기분이라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 외에도, 어른이 되면 당연히 그렇게 되지 않을까, 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은 일일이 열거하면 끝이 없을 정도로 많이 있다.
몇 가지 더 이야기 하자면, 어른이 되고는 자연스럽게 술을 즐기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쓰디쓴 술 한 잔은 즐긴다고 하기 보다는 어쩔 수 없다는 편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어른이 되면 당연히 주사가 아프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주사는 나이가 들어도 똑같이 아프고 피하고 싶은 것으로 남아있다. 어른이 되면 무서운 것이 없어질 줄 알았다. 이건 절반은 맞았다고 생각한다. 어릴 적 무서워했던 것들은 더 이상 무섭진 않게 되었지만, 다른 무서운 것들이 많이 생겨났다.
물론 이런 어릴 적의 이미지들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어른인 것도 아니겠지만, 나이에 따라, 성별에 따라 개개인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이미지를 어른이라는 단어에 부여하고 있는 시점에서 그건 될 수 있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그래서 지금은 그저 사람마다의 어른스러운 부분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든 아이같은 천진난만함과 어른스러운 성숙함이 뒤섞여, 미처 갖지 못한 성숙과 순수함을 타인에게서 발견하고는 장점과 단점이라는 말로 본받기도, 조심하기도 한다. 실제로 종종 주변의 가깝게 지내는 이들의 어른스러움에 감탄하곤 한다. 나에게는 없는 어른스러움에 대한 순수한 칭찬과 존경, 닮고 싶다는 마음이 그 감탄 속에 내포되어 있다. 동시에 그들의 아이스러운 모습에 종종 당황하기도 한다. 정말 생각하지 못했던 의외의 부분에서, '아아──, 이 사람은 이런 부분은 아이같은 면도 있구나' 라며 순수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도 나에 대해 같은 이야기를 하겠지만 역시 같은 시대를 사는 이들끼리 서로를 바라보며 성장한다는 게 이런 걸까. 여하튼 지금도 ‘어른이 되고 있는 상태’ 로 수렴하고 있으니, 이 부분은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만한 건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으로는 개성이 굳어져 간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투명한 물에 물감을 이것저것 풀어 섞어, 자신만의 색채를 확고하게 만들어 나가는 것. 그 과정에서 시간이 흐를 수록 원색의 순수함은 사라지고 점점 혼탁해져 가겠지만, 혼탁해진다는 표현은 다시 생각해도 가감없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어른이 된다는 말은 생각할수록 어딘지 모르게 모순을 품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실제로도 닿을 수 없을 것에 가까워 진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누군가를 속일 때 쓰는 말이기도 하고.
얼마전에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다.
"모든 사람들의 미성숙함을 제거하고 어른스러운 부분들을 전부 모으면 어른이라는 게 탄생하는 걸까?"
"으음──, 모르긴 몰라도 그건 어른이라기 보단 인공지능 로봇에 가까울지도 몰라."
역시 오히려 인간미가 없을 것 같다고 '하긴 그렇겠지' 라며 모두 고개를 끄덕였었다.
차라리 아이였던 내가 어른이 되어간다는 표현보다는 사람으로써의 내 모습이 완성되어 간다는 표현이 더 이 의문의 본질에 가까울 것 같다. 아직도 미숙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보면 조금은 진전이 있었을까. 지난 시절 스스로 쓴 책들을 가끔 펼쳐볼 때면,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아 불안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