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던 일주일을 끝내고 주말 오전에는 모처럼 늦잠을 자기로 마음먹었으나 따가운 햇살에 일찍 눈이 뜨여버렸다. 습관적으로 시계를 확인하니 이제 막 여섯시가 지났을 뿐이었다. 커튼을 치고 다시 잠들려고 누우니, 어째서인지 감은 눈 앞으로 수 많은 잡념들이 형상화되어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체념하고는 하는 수 없이 일어나 간단히 세수를 하고 호텔 조식을 먹으러 로비로 향했다. 조식 제공 명단을 보니 아직 아무도 내려오지 않았는지, 첫 번째로 조식 제공 명단에 방 번호를 올린 투숙객이 되었다. 그리고 심지어 나에겐 이번 주 첫 번째 조식이었다.
커다란 호수 위에 지어진 호텔의 식당에서 바라보는 아침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같았다. 무엇보다도 시야에 물이 더 가깝게, 육지가 더 멀리 보이는 풍경은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풍경이니까, 일반적으로 바다나 호수 근처의 호텔의 뷰가 가까운 육지를 거쳐 멀리서 물이 찰랑거린다는 걸 생각해보면 확실히 호수 위에 지어진 호텔에서의 뷰는 새삼스럽지만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호수 건너로 보이는 작고 촘촘하게 서있는 건물 위로, 한층 더 속도를 내며 본격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은 에그 베네딕트 두 개를 막 해치우고 망고 주스를 들이킬 무렵에는 이미 기세를 더해 한참 위로 올라가 있었다.
관광객들이 하나 둘 자리를 채우기 시작할 때, 방금 내린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들고 로비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 모처럼의 한가함을 만끽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평소와 다른 특별한 무언가를 했다기 보다는 그저 소파에 가만히 푹 눌러 앉은 채로 맞은 편의 체크인 데스크를 지긋이 응시하며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을 뿐이다.
어떤 여자가 자기 몸집만한 캐리어 두 개를 힘겹게 끌고 체크인 데스크#1 앞에 서서 뭔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옆의 창구에서 사람이 세 번이나 바뀔 동안 아직도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걸 보면 뭔가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 쪽에서 호텔리어로 보이는 말끔한 정장 차림의 여성이 오더니 두 번째 라운드가 시작된 것 같았다. 그 사이 #2 앞에서는 헝클어진 버드나무 무늬가 가득 그려진 시원스런 셔츠를 입은 남성이 지도를 펼쳐 들고 뭔가를 물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따금씩 데스크의 직원도 웃음짓는 걸 보면 옆과는 다르게 대화 분위기가 좋은 모양이었다.
뭐──, 어느 쪽이든 이질적이다. 나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국과는 다르게 여기 토요일은 반쪽짜리 주말인 모양이라, 어제까지 무더위 속에서 잔뜩 땀을 흘리고는 한 주 마지막에 겨우 한 숨 돌리고 있는 것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면 최근 몇 주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나날이었다. 어제까지는 정신없이 바빴던 통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번 출장에서는 업무적인 것들 말고도 돌아가기 전까지 몇 가지 명확한 결심을 세워야 할 것들이 분명히 있었다. 사적으로는 그렇게 환기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계기가 무엇이든 일상에서 잠시 멀어진다는 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렇게 로비에 한참을 앉아서 생각에 잠겨있다보니, #1데스크에 있던 호텔리어가 내게 다가와 뭔가 도움이 필요한지 말을 걸어왔다. 데스크 앞을 점거하고 있던 여성은 어딘가로 가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살짝 웃는 얼굴로 괜찮다고 말하며 푹신한 소파에서 일어나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창문을 활짝 열고 커다란 침대에 누워 다시 생각을 이어나갔다.
확신이 없다고, 혹은 계기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나고 생각해보니 사람에 대해서 명확하게 확신을 세울 수 있는 게 가능하긴 한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문득 떠올라, 여태까지를 되돌아 보면 그 중에 진실은 어느 정도가 있으며, 뭔가 확신이 설 만한 계기가 있었는지조차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일차적으로는 스스로에 대해서 조차도.
"확실히, 확신을 갖게 되는 계기는 있어. 그치만 그건 탐색의 결과가 아니야" 호안키엠 호수 앞에서 경쾌한 딱- 소리와 함께 맥주 캔을 따며 선배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요컨대 그냥 그렇게 지내다 보면, 어느 날인가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처럼 마음 속 전구가 반짝 켜지는 날이 오는 거야." 시원스럽지 못한 대답과 함께 시원한 맥주를 들이켰다. 열대야로 밤 늦게까지 후끈거렸던 5월 말의 하노이. 그리고 덧붙이길, "그런데 그 확신말이야. 어차피 얼마 못가서 반드시 무너지거든. 그래도 처음의 확신이 무너지면, 또 다른 이유와 확신이 생겨나. 그러니까 그 또 다른 이유를 같이 찾아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더 중요한거지. 앞으로도 계속."
진지한 고민인지 잠시 지나가는 방황인지 모호한 경계에 서서 혼란스러워하는 시기가 예고 없이 다시 한 번 찾아왔다. 희귀한 일은 아니다. 종종 그래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정도 납득할만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지만 이번엔 조금 다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금이 분수령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행동으로 옮기기에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는지도 모른다.
뭐──, 서른이라는 게 다들 그렇다고 하지만.
그렇게 시덥지 않은 고민을 끌어안고 있을 때, 시간은 금방 지나가 어느새 귀국 날짜가 되어있었다. 인천 공항에 발을 딛고 보니 여기도 벌써 뜨거운 여름이었다. 꿈나라에서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랄까.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고민에 대한 답을 찾는 걸 미뤄두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 해치워나가는 수밖에 없다. 마냥 때를 기다리며 고민하고 있을 수 없는 건, 시간도 나를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에.
고민을 거듭할수록 가치관이 한층 더 견고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그건 달리 말해서 유연함을 잃어간다는 것 같아 조금 슬픈 기분이 들기도 한다. 혼란스럽다는 건 그런 의미다. 이런 고민을 통해 한 걸음씩 착실히 나아가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한층 더 속박해가는 건 분명히 어디쯤인가 적정 선이라는 게 있을 터인데, 그게 어디쯤일까. 이미 지나쳐버린 건 아닐까.
이따금씩 바보같은 생각을 하곤 한다.
... 아니 어쩌면 거의 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