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에 모처럼 눈이 일찍 뜨여, 다시 잠들기는 시간이 조금 애매한 것 같아 노트북을 들고 집 앞의 커피숍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흐린 하늘에 바람까지 선선했던 탓에 카디건 앞을 여미고 걷는 내내 따뜻한 아메리카노 생각이 절실했다.
내가 첫 손님이었는지 아직 오픈 준비에 여념이 없던 종업원에게 간단히 주문을 하고는 먼저 정리된 창가 쪽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바탕화면의 익숙한 화면이 나타남과 동시에 낙서장이라는 폴더가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들어와, 나도 모르게 클릭을 두 번 하고는 어느새 하나씩 살펴보게 되었다.
언제 쓴 건지, 무슨 생각으로 시작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글들이 가득. 주문했던 커피를 받아와 다시 앉아서 차분하게 하나씩 읽기 시작했을 때, 마치 오래된 인형 가게에 와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게 안 쪽으로, 좀더 깊숙한 곳에 낡은 나무로 된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고 그 안에는 완성되지 못한 낡은 인형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어, 어느 인형은 팔이 없는 채로, 또 다른 인형은 머리가 없는 채로, 그런 식으로 모두 완성되지 못한, 저마다의 누락된 부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은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듯 했다.
말 그대로, 낙서장 폴더 안에 있던 수많은 글들은 그런 모습이었다. 잘 전개되다가 어느 순간 툭 끊어져 있는 글이 있는가 하면, 투박하지만 어느 정도 완성이 되어있는 글들도 있었고 부끄러운 단어가 잔뜩 쓰여진 알 수 없는 글도 있었고,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마구 휘두르는 것처럼 날카롭고 위험해 보이는 글도 있었다. 미완성이라는 붉은 색 꼬리표가 붙은 수많은 글들──.
신선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마침표를 찍지 못했던, 그러니까 조금 더 냉정히 말해 일단 선택받지 못한 작품들의 먼지를 털어내고 다락방 구석에서 콜록거리며 그들을 마주하는 건, 나름대로 그리운 추억들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정제되지 않은 글들은 저마다의 순수한 빛을 내며, 그건 원석의 순수함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는 눈이 부신 것이었으나, 곧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그렇게 푹 빠져 읽다가 어느 한 조각에서 조금 더 덧붙이고 싶은 말이 떠올라, 그 자리에서 마저 슥슥 써내려갔다. 즉흥적인 글이라 조금 더 다듬어야 될 테지만 이쯤이면 괜찮아, 라고 생각이 든 순간 타이핑을 멈추고 다시 한 번 읽기 시작했다.
내게 글을 쓴다는 건 항상 이런 식이라, 어느 날 마음을 다잡고 눈 앞에 노트와 종이 한 장을 두고 시작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요컨대 어느 정도 밑작업이 되어있는 글을 앞에 두고 고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어떤 면에서는 조금 더 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의 주제를 두고 과거와 생각이 많이 바뀐 경우에는 차라리 백지부터 시작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한 작업이 한 번에 완성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좀처럼 없어서, 이런 식으로 두 세번 정도는 거쳐야 다른 폴더로 옮겨 두고 더 이상 손대지 않게 된다.(결국 나중에 퇴고하면서 한 번 더 손을 대긴 하지만)
밑작업은 크로키를 그리는 것과 비슷해서, 정말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예를 들면 퇴근길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휴대폰 메신저에 스스로 보내는 메시지로 기록해 두거나, 주머니에 수첩이 있으면 문장이나 단어만 간단히 메모해 두기도 한다. 사물이나 풍경에서 뭉클했던 게 있는 경우는 사진을 찍어 두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느낌만 담아둘 수 있다면 방법과 형태는 아무래도 좋다, 라는 식이다.
그러나 직접 해보니 이건 상당히 비효율적인 방식이라, 이렇게 엄청난 양의 다듬어지지 않은 기록이 쌓이고 나중에 한꺼번에 몰아서 보기 시작하면 실제로는 왜 이런 문장을 적어둔 건지, 왜 이런 사진을 찍어둔 건지 그때의 느낌을 잘 기억할 수 없는 경우도 꽤 많이 있다. (뭐──, 단순히 내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을 뿐인지도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어느정도 균형이 유지되는 이유는, 결정적으로 내가 게으르기 때문인데, 이렇게 여기저기 저마다의 형태로 흩어져 있는 글을 모아 한 편의 글로 엮는 작업은 생각보다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라, 내 정리 속도가 소재의 공급 속도를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하루 정도면 낙서장 폴더에 있는 글들을 전부다 한 번씩 곱씹을 수 있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낙서장 폴더에서 병목이 생기더니 이제는 마음먹고 하루 종일 지난 글들만 읽는다 해도 절반을 해치우기가 힘들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애초에 이렇게 문장, 단어 혹은 사진만 가지고는 처음의 느낌이나 생각을 오래 보관해 놓을 수도 없기 때문에, 한 번 시작하면 되도록 쓸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이어 나가서, 어느 정도 문단의 형태로 다듬어 두는 작업까지는 해 두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비유하자면, 인형의 속을 채울 솜뭉치를 창고에 넣어두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게 인형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담요 속을 채울 생각으로 보관해 놓은 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팔이든 몸통이든 일관성을 잃지 않고 뒤이어 작업이 가능한 어느 상태까지는 만들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나처럼 둔감한 사람은 어느 정도 자신의 손을 직접 움직이는 노력을 들여야 스스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지시킬 수 있기도 하고.
아무튼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꺼내 읽었을 때, 생각을 조금 더 이어 나갈 수 있다면, 덧붙이고 끼워 넣고 도려내고 다듬는 작업을 한다. 어떤 작가는 ‘글을 내면에서 숙성시키는 작업’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정도로 글에 대해 계속 곱씹으며 생각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숙성이라기 보다는 환기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확실히 제멋대로인 글쓰기라고 한다면 그렇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만, 하나의 완성된 글이 나오는 것에는 저마다의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니, 방식을 바꿀 생각은 아직 해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도 더 효율적이고 좋은 방법을 찾지 못한 것도 있고.
오랜만에 지난 글들을 다시금 읽다 보니 이런 저런 상념들이 마구잡이로 떠올라 생각이 많았던 하루였다.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들이키고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스스로가 얼마나 글에서 멀어져 있었는지 새삼 마음을 다잡는 소소한 계기가 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문득 휴대폰을 보니 시간은 벌써 점심 가까이 되어, 아침부터 흐려지기 시작한 하늘은 이윽고 담아놓은 빗방울을 조금씩 흘려대고 있었다. 우산은 미처 챙겨나오지 못했으니 이대로 비가 그칠 때까지 느긋하게 할 일을 하기로 하고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더 주문했다.
아아──, 어째서인지 긴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