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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색하늘 May 16. 2023

꿈 #3.

  언제부터인가 한동안 꿈을 잘 꾸지 않게 되었다. 일전에는 종종 흥미로운 꿈을 꾸곤 했는데, 지금은 꾸더라도 엄청나게 현실적인 꿈이 대부분이라, 그다지 꿈이라는 느낌 없이 하루 중 어느 일부분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최근에 아주 오랜만에 상당히 재미있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본격적으로 꿈 이야기를 하자면, 조금 유치하지만 이능력에 관한 것이었는데 배경은 신기하게도 어느 도심 한복판이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풍경이었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는, 그런 흔하디 흔한 도시 풍경. 사거리 중앙에서 정신차리고 보니 교차로의 횡단보도 신호등의 녹색등이 전부 깜빡이고 있는 상태였다. 사방에 가지각색의 자동차들이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릉부릉 소름돋는 엔진 소리를 내며 당장이라도 달려나올듯한 모습에 일단 아무 생각없이 냅다 오른쪽으로 뛰어 보도블럭 위로 올라갔다.

  뒤를 돌아보니 커다란 약국이 하나 있었다. 아니, 사거리 모퉁이에는 전부 같은 약국이 있었다. 그리고 검은 정장을 입고 중절모를 바르게 쓴 신사가 한 명, 비도 오지 않는 거리에서 검은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는 나를 내려다 보며 그 신사는 이제 상황파악이 됬느냐,며 말을 걸었다. 나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니 그 신사의 얼굴이 역시 낯이 익었다.


  "간단히 말해, 꿈일세 꿈. 어린 시절에는 곧잘 꾸지 않았었나. 아무튼, 조금 있으면 여기 시야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자네를 쫓기 시작할거야. 이유는 묻지 말게. 그냥 그런 설정이니까."

  이유도 모른 채로 보이는 모든 사람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야 한다니, 따지고 싶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신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그럴 시간이 없네──, 라고 딱 잘라 말했다.

  "자,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자네에게 두 가지 도움이 되는 능력 중 하나를 줄 수 있다는 거야. 둘 다는 안돼. 둘 중 하나만 줄 수 있어. 이유는 묻지 말게. 그냥 그런 설정이니까."

  일단 냉정한 표정으로 듣고 있으면서도, 뭐 이렇게 제멋대로인 설정이 다있나 싶었지만 로마에서는 로마 법을 따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아마 이 세계에서도 나름대로 정해진 규칙이 있는 모양이니 일단 차분하게 더 들어보기로 했다.

  "한 가지는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능력이라네. 기차보다도 빠르게 달릴 수 있게 될 거야. 게다가 최고속도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인 가속을 할 필요도 없어. 자네가 마음만 먹으면 바로 최고속도로 이동이 가능하지"
  "다른 한 가지는 뭡니까?"
  "나머지 하나는 높이 뛸 수 있는 능력이라네. 빌딩 꼭대기까지 한 번의 도약으로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높이 뛸 수 있어"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능력과 높이 점프를 할 수 있는 능력. 검은 정장의 신사는 나를 향해 양 손을 내밀었다. 한 쪽에는 파란 알약이, 다른 한 쪽에는 빨간 알약이 한 알씩 놓여 있었다. 마치 매트릭스의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내밀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으나 상황은 전혀 달랐다. 그는 적과 맞서 싸울 것인지 순응할 것인지, 에 대한 것이었으나 나는 어떤 방식으로 도망칠 것인지, 에 대한 것이었다.
  신사는 내가 한 쪽을 고르기 전에 말을 덧붙였다.

  "지금 이 두 능력은 단순히 각력이 좋아진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저들은 저를 붙잡아서 어떻게 하려는 건가요?"
  "그야 나도 모르지. 그들에게는 그들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자네를 쫓게끔 할거야. 나는 자네에게만 말을 걸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으니까,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걸세. 이유없이 자네가 이 상황에 놓인 것처럼 그들도 이유없이 자네를 쫓을 수도 있겠지"
  "그럼 언제까지 도망쳐야 하나요?"
  "나는 도망쳐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네. 다만 그들이 자네를 쫓기 시작할 거라고 이야기했을 뿐이지. 여태까지 계속 그랬었거든. 순순히 그들에게 붙잡혀준 후에 이유를 묻든, 일단 도망을 가든 자네 선택이라네. 이 꿈은 일단 새벽녘, 다음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될거야. 어떤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게 될지는 모르네. 다만 이 자리에 있던 모두는 도망가는 걸 선택 했었지"

  그 말을 듣고 역시 도망치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게 술래잡기 정도로 가벼운 게임이라 별다른 이유없이 붙잡고는 그대로 별일없이 게임이 끝나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결론까지 생각이 다다르게 되니, 도망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느 순간부터 행인처럼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까지 나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온다거나 하는 움직임은 없었지만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보아 저쪽은 아직 설명이 다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고민 끝에 점프를 택했다.  

  "그럼 행운을 빌겠네. 아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네. 상식적이지 않은 능력은 그 사용한 뒤의 후유증을 조심해야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자네의 각력이 강화된 건 아니니까 말이야."

  파란 알약을 삼키고 곧바로 달리기 시작해, 신사의 말이 점점 멀어지며 마지막으로 들린 후유증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맴돌았다. 시야에서 사람들이 사라질 때까지 달렸다. 빌딩의 높이가 전반적으로 조금 낮아졌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기분탓이었다고 생각한다. 시내라고 부를만한 곳을 조금 벗어나니 도로에는 차도 하나 없이 신호등도, 모든 간판들도 불이 꺼져 있었다. 사람은 커녕 시야에 움직이는 물체 하나 보이지 않았다.



...쓰다보니 길어졌군요. 꿈 #4에 계속 이어서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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