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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액화철인 Apr 14. 2023

’ 성난 사람들‘(2023)과 그림 한 점

피터르 에르첸의 ’ 정육점과 자선을 베푸는 성가족‘(1551)


19세기 런던의 이스트 엔드 지역은 창의적인 속어의 산실이었다. 따로 사전까지 나올 정도로 그 종류도 많았고 발상들도 특이했다. 주로 각운이 맞는 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체하는 식이었는데 예를 들자면 ‘브리스톨 시티’라는 말이 여자 젖가슴을 뜻하는 ‘티티’와 각운이 맞다는 이유로 ‘브리스톨’이 젖가슴이란 의미로 쓰인다거나 ‘독 앤 본(개와 뼈다귀)’라는 표현이 ‘폰(전화)’와 각운이 맞다는 이유로 ‘독’이 전화기로 쓰인다든지 하는 식이다. 주로 그 지역에 거주하던 하층민들과 범죄자들이 자기들끼리의 결속을 다지고 자신들이 하는 말을 외부인이 알아듣기 힘들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런 속어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런 속어 중엔 범죄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것들이 꽤 있었다. 절도 피해자들이 도둑을 쫓아가며 외치는 ‘Stop thief!(스톱 씨프! 도둑 잡아라)’라는 말을 놀리기 위해 만들어진 ‘Hot beef!(홋 비프! 뜨거운 쇠고기)’ 역시 이런 각운 놀음에서 기원을 두고 있다. 원래 쇠고기라는 뜻의 비프(beef)라는 명사가 소리 지른다, 불만을 표한다는 뜻의 동사로도 쓰이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이 속어다. 그 정서가 진화해 그 단어는 20세기 초중엽에서는 누군가에게 원한(불만)이 있는 상태, 서로 싸우는 상태를 가리키는 속어가 된다.

A24가 제작한 작품 답게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는 포스터

넷플릭스의 ‘성난 사람들’(2023)의 원제 Beef는 소고기가 아니라 원한이라는 의미다. 목축이나 육가공업이 소재가 아니고 사소한 일로 서로에게 ‘비프(원한)’를 품게 된 두 사람의 이야기다. 한국의 누군가는 이 시리즈를 한국인 특유의 화병을 바라보는 교포의 시선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미국의 누군가는 2023년을 현재 각자의 반향실에 갇힌 채 편향적인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 대한 우화로 읽기도 한다. 원래 잘 만들어진 허구란 나와 다른 누군가의 특이한 이야기임과 동시에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이야기인 법이니까 이 작품을 보는 다양한 시각 자체가 높은 작품성에 대한 방증이다.

개별적 현상들을 인종이라는 특징으로 묶는 건 거북하지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라는 희대의 걸작으로 현대인의 소통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 동양인 예술가들의 철학적, 예술적 쾌거가 이 넷플릭스 시리즈를 통해 재현된다는 뿌듯함을 감추기는 힘들다. (두 편 다 A24 스튜디오의 손이 닿은 건 우연의 일치?) ‘비프’는, 2023년이 4분의 1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올해 이 보다 더 훌륭한 드라마가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잘 만들었다. 이 시리즈에 대해 맘 잡고 쓸라치면 책 한 권은 가볍게 채울 수도 있을 정도로 느낀 바가 많지만 지금은 에피소드 1, 타이틀 부분에 나오는 그림 한 점 이야기만 해보려고 한다.


이 시리즈의 특징 중 하나는 현학의 극을 달리는 에피소드 타이틀들이다. “살아있다는 황홀함”, “내 속에는 울음이 산다.”, “이토록 내밀하고 비밀스러운 존재.” 등등. 극 중에 따로 직접 등장하지도 않고 특별히 극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도 않는 모호한 문구들은 찾아보면 프란츠 카프카, 시몬 드 보부아르, 잉그마르 베르히만, 실비아 플래스 같은 명사들의 저서나 인터뷰에서 발굴해 온 인용구다. 안 그래도 이 심오한 제목들은 심오함을 넘어 심난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림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1편의 제목은 “새들은 노래하는 게 아니야. 고통에 울부짖는 거지”. 베르너 헤어조크의 영화 ‘위대한 피츠카랄도(1982)’의 악몽 같은 제작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인 ‘꿈의 무게(1982)’의 한 장면에서 헤어조크는 영화의 실제 로케인 아마존 밀림을 배경으로 선 채, 카메라를 향해 진한 독일 억양의 영어로 다음 같이 뇌까린다. “물론 여기엔 불행이 가득하지. 그러나 그 불행은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과 같은 종류야. 여기 저 나무들도 불행하고, 또 저 새들도 불행한 거야. 내 생각엔 쟤들은 노래하는 게 아니야. 고통에 울부짖는 거지.”


나무와 새들의 불행에 대해 설파하시는 헤어조크 감독님


헤어조크가 피력한 아마존 정글의 추악하리만치 억척스러운 생존력에 대한 감상을 인용한 1화의 제목과 함께 나타나는 건 16세기 네덜란드 화가인 피테르 에르첸의 ‘정육점과 자선을 베푸는 성가족(1551)’이라는 정물화를 가장한 종교화다.

피테르 에르첸 ‘정육점과 자선을 베푸는 성가족’(1551)

16세기의 네덜란드는 스페인 가톨릭 정부로부터 독립하면서 종교적인 면에서도 가톨릭과 다른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칼뱅으로 대표되는 정말 빡센 종교 개혁은 가톨릭의 흔적을 네덜란드 사회 곳곳에서 지워나갔다. 그중 하나가 바로 미술이었다. 중세 미술의 대표적인 소재는 성경 이야기였으나 종교 개혁 이후의 네덜란드는 종교화 자체를 멀리했다. 칼뱅주의는 거룩한 표현이 미덕이던 기존의 가톨릭 미술에 대해 “신을 섬기는 게 아니라 그림을 섬기는 꼴”이라면서 우상숭배로 배척했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전체의 이런 분위기는 과격분자들을 부추겨 성상 파괴 운동을 감행하게 만들었다. 이들이 기존에 그려진 성화까지 쫓아다니면서 부수고 태우는 지경이라 새로운 종교화를 그리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네덜란드에서 풍경이나 정물이 단순히 성서나 신화 이야기의 부가 요소가 아니라 독자적인 장르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종교화를 그릴 수 없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피테르 에르첸의 ‘정육점’ 역시 언뜻 봐서는 그저 각종 육류와 소시지를 멋들어지게 그린 정물화로 보인다. 가로 폭이 160센티가 넘는 대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분명 개인 가정이 아닌 사업장 같은 공공장소에 걸 목적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데 소재가 소재인만큼 아마도 정육업자길드가 의뢰한 것이라 짐작된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숨겨진 종교적인 메시지가 있다.

첫 시선을 빼앗는 소머리 너머로 보이는 건 접시에 교묘하게 십자가처럼 플레이팅 된 생선이다. 이건 보통 사순절 때 고기를 먹지 않는 신자들을 위한 좋은 단백질원이다. 실제로 사순절 주간에는 경건한 마음을 다지기 위해 생선 두 마리(혹은 조각)를 저렇게 교차해서 내놓곤 했었다. 그림 속 생선 요리는 바로 뒤에서 펼쳐지는 성서의 한 장면으로 안내하는 표지판 역할을 한다.

그 장면 속 인물들 중 중심이 되는 남자와 여자와 아기는 비록 당시 네덜란드인의 복장을 하고 있지만 헤롯왕의 핍박을 피해 이집트로 도망가는 예수와 부모다. 성가족이라는 상징딥게 이 와중에도 거지들에게 뭔가를 나누어주는 선행을 하고 있다. 그 뒤의 사람들은 행렬을 이루어 왼쪽을 향해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들이 가는 행선지는 고기와 프레첼을 넘어 다음 칸에 그려져 있다. 바로 첨탑이 있는 전형적인 교회 건물이다. 이 건물이 교회라는 힌트는 바로 위쪽 창틀에 걸린 프레첼이다. 원래 프레첼 자체가 이탈리아의 수도승이 기도하는 법을 익힌 아이들에게 주려고 개발한 빵이며 디자인 역시 기도하려고 손을 맞잡은 형태라는 설이 있다. 이 설을 굳이 믿지 않더라도 계란과 유제품이 들어가지 않는 프레첼은 역시 아까의 생선과 마찬가지로 사순절에 잘 먹는 음식이다. 오른편에 숨겨진 그림 역시 누군가 사치를 상징하는 굴과 홍합을 먹고 버린 껍질들 위에서 노동을 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그린다. 이 역시 복음서에 나오는 ‘돌아온 탕아’ 이야기를 표현하는 듯하다. 부모로부터 받은 재산을 탕진하고 죄악과 사치가 가득한 이역만리에서 고생을 하는 남자가 중심이다.


이 그림이 정육 업자 길드 건물의 중앙홀에 걸려있던 모습을 상상해 보자. 당시에는 성가족 어쩌고 하는 제목이 없었을 테니 지나치는 사람들은 이 그림이 그저 정육 업자들의 업을 다룬 것이라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을 의뢰한 사람들은 그 그림에 숨겨진 종교적인 알레고리를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종교화를 거는 일반적인 목적이 미덕의 상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고기 속에 숨겨진 성가족을 볼 때마다 자신들의 풍요에 감사하고 더욱 불행한 이에게 자비를 베풀며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새롭게 다졌을 것이다. 게다가 그냥 고기 그림으로도 볼 수 있으니 설령 눈치 빠른 성상 파괴 주의자들이 뭐라고 한다 해도 어물쩍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화가 조합은 화가들의 성인이자 누가복음을 쓴 누가의 이름을 따서 성누가길드라고 불렸다. 이 조합은 유럽 전역에 존재했다. 이 그림을 그린 피터르 에르첸 역시 앤트워프에서 활동할 당시 이 길드 소속이었다. 화가 길드에 저런 성스러운 이름이 붙었던 건 중세 미술의 발달과 종교화의 영향은 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화가들이 성상 파괴 운동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졌을 리는 없다. 에르첸의 경우도 자신이 성당에 납품했던 제단화들이 파괴되고 불타고 심지어는 조각조각 잘리는 수모를 겪었던 사람이다. 운에게 많이 기댈 수밖에 없어서 다소 종교적이 될 수밖에 없는 정육 업자들의 길드가 종교적 메시지가 감춰진 그림을 요구했을 때 아마도 그는 기꺼이 정성스레 응하지 않았을까?


사실 이 그림이 비프의 1화 타이틀을 장식한 것은 저런 역사적 종교적 함의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극의 제목인 ‘비프(소고기)’에 걸맞게 손질된 정육이나 소대가리가 크게 걸려있기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역사를 감안하지 않고 저 그림을 보면 크게 대비되는 두 가지 모습이 고기로 만든 파사드의 뒷면에서 이분법적 계급론을 피력하고 있다. 오른 편의 고단하게 허리 숙인 남자는 다른 사람들의 사치의 폐허 위에서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다. 왼편의 3인 가족은 화려한 퍼레이드를 하며 자신들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우월감을 과시하고 있다. 오른쪽의 배경은 악당들로 가득한 수상한 실내고 왼쪽의 배경은 쾌적한 자연이다. 극 중 두 주인공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두 가지 그림을 정교하게 그려진 육류가 감싸고 있는 모습. 정말이지 이 그림은 극을 개요를 완벽하게 정리하는 동시에 이 드라마가 보기보다 복잡한 함의를 담고 있어 파면 팔 수록 더 많은 것을 보여줄 것이라는 자신감의 선언까지 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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