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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액화철인 Jul 13. 2022

콩코드, 석양, 엠파이어 스테이트

영화 ‘허영의 불꽃’ 중 가장 비싼 10초짜리 장면의 탄생 비화

    브라이언 드 팔마의 “허영의 불꽃”에 보면 극 중 팜므파탈인 마리아 러스킨이 탑승한 에어 프랑스의 콩코드가 JFK 공항에 착륙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깨나 보신 분들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항공기 착륙 장면이야말로 장면 전환을 위한 너무나 흔한 장치다. 굳이 새로 찍을 필요도 없다. 게티 같은 스톡 자료에서 대충 찾아다가 넣고 여기에 자막으로 마카오, 홍콩, 리스본 뭐 이렇게 자막까지 달아주면 관객들은 아묻따 장소가 바뀌었구나 납득해버리니 지금도 많은 드라마/영화들이 자주 쓰는 클리셰다.

    그런데 문제는 “허영의 불꽃”의 그 10초짜리 콩코드 장면은 무려 8만 불이나 들여 생짜로 찍은 장면이라는 점이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그거 10초 보여주려고 우리 돈으로 1억 좀 넘게 쓴 셈인데, 원체 방만하게 예산을 집행했던 디지털 이전의 90년대 할리우드 영화 기준으로도 이건 좀 말이 안 되는 짓이었다. 이 어마어마한 돈질의 규모에 대해 피부로 와닿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 영화의 예산이 4천7백만 불, 길이가 126분, 다시 말하면 초당 평균 6천 불 정도 썼다고 보면 되는데 제작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액의 몸값을 받은 배우들이 하나도 안 나오면서도 10초 동안 초당 8천 불이 들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이 장면을 감독한 사람은 드 팔마가 아니었다. 즉 영화 마케팅의 “얼굴 격인 탤런트들(billed talent)”, 주연배우나 감독이 전혀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영화 중에서 가장 비싼 10초를 당당히 차지해버린 이 장면의 뒷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특징 중 하나는 클리셰에 대한 극도의 혐오다. 뭐든 남들과는 다르게 색다르게 찍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감독이었다. 항공기 착륙 장면으로 장면 전환을 설명하는 뻔한 짓 같은 건 절대 할 리가 없는 감독이다. 그런데 마이클 크리스토퍼가 집필한 이 영화의 대본에는 “EXT. 케네디 공항, 밤. 하늘은 이착륙하는 항공기들의 미궁이다.”라는 부분이 들어있었다는 거. 대본을 쓴 사람의 입장에선 주인공의 삶을 박살 낼 팜므파탈 마리아가 유럽에서 드디어 미국으로 날아온다는 중요한 부분이라 한 번 갑툭비행기로 리듬을 끊어줘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드 팔마는 “내가 비행기 착륙 같은, 그딴 클리셰를 내 영화에 넣는 날이 내가 은퇴하는 날”이라며 다소 강경한 입장. 그런데 거기에 내기를 건 용감한 사내가 있었으니 바로 세컨드 유닛 감독인 에릭 슈왑(32). 일반적으로 세컨드 유닛 감독이라면 (주요) 배우들이 안 나오는 자투리 장면을 찍는 역할이니 만약에 “항공기의 미궁” 같은 걸 찍어야 한다면 바로 슈왑의 역할이었다. 슈왑은 드 팔마가 우왁 소리를 낼 정도로 놀랄만한 장면, 영화에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멋진 장면을 찍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오오 젊은이의 패기여.


    슈왑의 머릿속에 있는 장면은 다음과 같았다. 콩코드(마리아 같은 허영 덩어리는 콩코드만 탈 거 같으니까) 한 대가 석양을 배경으로 활주로에 접근, 근데 배경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걸림 그리고 지는 태양도 그 뒤 한가운데 딱 걸려있음. 요즘이야 CG로 합성하면 간단한 장면일 거 같지만 당시엔 그런 거 없었으니 찍어야 했다. 그냥 석양을 배경으로 착륙하는 거 찍으면 끝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일단 비행기는 정해진 활주로에 정해진 방향으로 내려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상황이 야기시키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활주로와 대체로 일직선이 된 각도에서 엠파이어스테이트까지 카메라 안에 잡으려면 카메라는 서북서를 향하게 된다. 이 각도에서 태양이 프레임 중앙에 들어오는 건 날이면 날마다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지구는 자전축이 기울어진 채로 태양의 주변을 돌기 때문에 일몰의 궤도는 매일 달라진다. 북반구의 경우 겨울(동지)이 가까워질수록 궤도는 남쪽 하늘 쪽으로 이동하고 여름(하지)이 가까워질수록 북쪽으로 이동한다. 활주로 끝 저 너머에서 착륙 중인 비행기를 크게 잡으려면 망원렌즈를 써야 하고 건물까지 걸고 태양도 크게 담으려면 초점거리도 극도로 길어지는 상황. 다시 말해 이렇게 작을 대로 작아진 프레임 안에 태양이 완벽한 각도로 들어오는 날은 1년에 이틀.



서북서 하늘의 일몰은 매일 다른 궤도로 떨어진다.


    요즘이야 일몰이 어느 날에 어느 궤도로 벌어지는지 각종 천문 앱을 쓰면 간단히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엔 그런 거 없음. 슈왑은 수소문 끝에 관련 태양 궤적 계산기를 설계하는 카시오 사에 근무하는 기술자의 자문을 받아 1990년 6월 12일, 하지를 9일 앞둔 날이 여러모로 제일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촬영 준비에 들어간다. 태양이 프레임에 걸려있게 될 시간은 30초 정도. 콩코드를 운용하는 에어프랑스에 의뢰, 한 대를 섭외해서 주어진 이 시간 동안 딱 그 위치로 착륙하게 만들어야 했다. 드골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가 중간에 심한 난기류라도 만나서 지체되거나, 갑자기 날씨가 미쳐서 비구름이라도 낀다면 그야말로 모든 게 수포가 될 상황. 준비된 카메라는 다섯 대. 어느 하나가 고장 날 것에 대한 대비도 있었겠지만 최고의 각도를 정확히 예측하는 건 불가능했으므로 각각 조금씩 다른 각도로 잡고 있었으리라.


진인사하고 대천명한 바로 그 1억짜리 장면

     미친 도박 결과물을  팔마는 매우 마음에 들어 했고 기꺼이 자신의 작품에 사용한다. 엔진의 열기와 여름 날씨가 만드는 아지랑이 때문에 이글거리는 붉은 뉴욕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흉조 같은 콩코드가 착륙하는 장면은 이렇게 탄생했다.




코다:

    클리셰 범벅인 “오징어 게임”을 보고 있자니 왠지 이 콩코드 장면이 생각난다. 클리셰를 거부하는 이전 세기의 집념과 클리셰 바닥에서 윤활제 포르노 찍듯 뒹굴거리는 꼬락서니를 비교하자니 딱히 어느 쪽이 좋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 이전에 쉽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진다.

“허영의 불꽃”은 폭망 했다. 평론가들도 정말 쇠스랑을 들고 찢어발기듯 욕을 했고 박스 오피스에서도 손익 분기점은커녕 예산의 1/3도 못 회수하는 참패를 했다. 그리고 집념의 젊은 청년 감독 에릭 슈왑은? 입봉작이 망하고 나이 60에 아직도 드팔마 감독의 세컨드 유닛 감독을 하고 계신다. “오징어 게임”은? 욕은 좀 먹었어도 달콤한 성공가도 질주 중. 


결론: 너무 아등바등 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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