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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액화철인 Sep 22. 2022

옛 영화 다시 보기 1: 도그빌(2003)

전능자의 응징과 아메리카니즘

case 1. 


    ‘여호와의 증인’은 군 복무를 거부해야만 한다. 그들의 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단지 군 복무뿐만이 아니라 전쟁이나 살인에 관련된 것은 피해야만 한다 그래서 예전에 교련이라는 군사 훈련 과목이 고등학교 내신에 깊이 영향을 미치던 시절엔 여호와의 증인인 남학생은 전체 내신이 좋을 수가 없었다. 우리 반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두 명이나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전부 얼룩이 교련복을 입고 수업을 받는 동안 특별히 그들은 정복을 입은 채 자습을 하는 것이 허용되었었다. 어쨌든 종교의 자유가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니까. 하지만 여기는 법보다 주먹이 2만 배는 가까운 폭력 국가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허울 좋은 자유에 대한 대가는 결국 그 반을 맡은 교련 선생에게 달려 있는 거였다. 


    고교 1학년 때 교련 선생은 교실에서 수업할 때는 그들에게 자습을 허용했으면서도 운동장 실습시간에는 시간 내내 체력단련을 빌미로 시간 내내 운동장 토끼뜀을 시켰다. 2학년 때 교련 선생은 교실수업시간엔 책상 위에 무릎 끓고 팔 앞으로 뻗어를 시켰고 운동장 실습시간에는 “원산폭격”에서 “한강철교”에 이르는 다양한 얼차려 콤보와 정신봉 세례로 그들이 절대 가지 않을 군대의 샘플 체험을 시켰다. 내가 처음으로 직접 목격한 체제에 의한 종교탄압의 현장이었다. 


    3학년이 되자 다른 교련 선생이 등장한다. 앞의 둘처럼 얼차려 따위를 시키는 선생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들을 자신의 논리로 설득을 시키려고 하는 데 있었다. 교련 선생이라는 직업을 얻기 위한 교육과정과 또 그 직업의 숙련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논리와 언변이라는 게 뭐 대단한 건 아니라서 옆에서 듣는 사람이 다 괴로웠다는 기억이 있다. 매 교련 시간마다 듣기 피곤할 정도로 비슷비슷한 3분짜리 여호와증인 특화 강의가 빠지지 않았다. 자주국방이 강조될 때도 있었고 국민의 책임이 강조될 때도 있었고 이승복의 반공 신파도 판문점 도끼만행의 공포물도 가끔 튀어나왔다. 내용이 어떤 식으로 어떤 페이스로 전개가 되든 끝은 반드시 이런 가정으로 끝나곤 했다. 


“만약 괴뢰군이 쳐들어와서 너희 눈앞에서 너희 누나나 엄마 혹은 여동생을 강간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네 손에 총이 들려있다. 손가락은 방아쇠에 걸려있고 탄창은 실탄으로 가득 차있다. 어쩔 꺼냐?” 


case 2. 


    아는 친구 여자가 햄스터 암수 한 마리씩 두 마리를 한 우리에서 기르고 있었다. 어느 날 일어나 보니 덩치가 조금 큰 암놈이 수놈의 머리를 전부 비워 놓았다. 그야말로 골을 파먹은 거지. 이 돌연한 참사에 그 애는 그저 기가 막혀하고 있는 데 당시 동거하던 그 애 남자 친구가 베개커버를 벗겨내어 그 안에 암놈을 집어넣고 빙빙 돌려 바닥에 몇 번 패대기를 치고 그 몇 번 밟더니 잘 뭉쳐서 돌로 짓이겨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남자 친구의 말로는 자기 종족을 먹은 것에 대한 ‘응징’이란다. 






‘도그빌’


1. 영화

    이 영화는 중심은 “수용(Acceptance)”라는 개념이다. 톰 에디슨은 마을 사람들이 배워야 할 최고의 덕목이 바로 수용이라고 주장한다. 그레이스를 받아들이는 행위는 그 주장에 대한 적절한 실험이다. 영화는 대부분은 전개는 그 실험에 대한 건조한 보고로 진행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결판난 후에 갑자기 수용자와 피수용자가 바뀌어버리면서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맞는다. 이 시점에서 영화의 관심은 온통 그레이스의 “수용”과 그 방법으로 쏠려버린다. 결국 톰 에디슨이라는 바보가 그녀의 수용 방식에 대한 간섭을 시도하다가 화를 초래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사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수용”과 “똘레랑스”는 같으면서도 다른 개념이다. 어원적 접근으로 보면 수용은 능동의 뉘앙스가 있지만 똘레랑스는 수동적이다. 그러나 결국 절박함과 적극성의 이미지를 떼어내고 나면 두 단어는 본질적으로 같은 “태도”를 말하고 있다. 


    “수용/똘레랑스”는 흔히 진보의 척도로 쓰인다. 존속살해범이 있다면 여기에 대해 보수는 당장 교수대에 매달라고 이야기하고 진보는 환경과 개인의 잘못의 범위에 대한 논쟁을 한다. 낙태, 동성애, 인종 문제 역시 그걸 다루는 입장 차이는 결국 “수용범위”의 차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회가 얼마나 진보해있는가를 측정하기 위해 그 사회의 똘레랑스의 레벨을 살펴본다. 그 기준에 의하면 미국 사회는 한국사회보다 ‘진보’해있고 네덜란드는 미국보다 진보해 있다. 


    우디 알렌의 코미디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에서 가석방된 범죄자 찰스 페리(팀 로스)를 가족 식사에 초대한 진보 성향의 상류층 가족들의 모습에 이 딜레마가 들어있다.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느냐라는 질문이 얼마나 진보적이냐를 가리는 척도라면 과연 어디에다 선을 긋는 것이 좋은가 라는 것. 포르노는 받아들이나 아동포르노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부모 살해범은 이해해도 여동생 강간범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 동성애 결혼은 인정해도 인간-동물 간의 결혼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철학적 진보라는 단순히 진보를 위한 진보 속에서는 끝 간 데 없이 범위를 넓혀가려는 내제적 메커니즘과 제어의 당위성 찾기가 끊임없이 충돌 하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에 언제나 상수로 존재하는 것은 진보가 가진 보수에 대한 우월성과 연민이 숨어있다. 수용이 능력이고 미덕이라고 전제된 상황에서 수용불가는 ‘몰이해’와 ‘전근대성’에 기인하는 무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적 수용(Acceptance)에는 “오만함(Arrogance)”이 깔려있게 되는 법이다. 한마디로 “내가 나은 인간이니까 받아들인다 (혹은 견딘다)”라는 태도가 부록처럼 따라온다는 이야기다.

 

    그레이스(니콜 키드먼)는 이런 입장에서 심판자로서의 보수권력의 오만함을 보수 성향인 아버지에 설파한다. 그런 그레이스에게 아버지(제임스 칸)는 진보사상의 오만함을 이야기하며 반론을 펼친다. “네가 마을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것 역시 그들보다 나은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렇게 한다는 오만함의 동기가 숨어있다”라고. 그리고 또 다른 방식과 범위를 통해 수용의 행위를 계속하면서도 응징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제시한다. 그의 논지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 수용의 또 다른 방식: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방법이 꼭 용서일 필요는 없다.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때문에 징벌을 내려야 할 때도 있다.

 - 수용의 또 다른 범위: 마을 남자들이 매일 밤 그레이스를 강간한 죄악을 정당한 입장에서 우러난 행위였다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녀 스스로가 그 행위에 대한 분노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 역시 정당한 입장에서 우러난 행위라는 수용 범위 안의 일이다. 


    재앙은 그렇게 정당화되고 그때까지 쌓여온 관객들의 분노에 걸맞은 시적 정의 실현을 위해 달려간다. 관객들은 그레이스가 사실은 권력자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이 진정으로 개 같은 마을에 엄청난 재앙을 내려주길 바란다. 그 공분을 이끌어 내는 것은 감독의 연출 역량이다. 벽이 철거된 채 청사진으로만 만들어진 세트에서는 그야말로 인간군상의 만화경이 펼쳐진다. 저 멀리 그레이스가 강간당할 때 무심한 사람들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세트가 무대의 형태와 닮아있다지만 결코 연극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카메라의 집요하면서도 무감정적인 파고듦을 허용한다는 점에서는 극도로 영화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런 벌거벗겨진 관계를 통해 감독은 차분하게 마을의 인간들에 대한 분노를 꼬박꼬박 적립해나간다. 특정 캐릭터에 몰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 상황에서 관객들은 파리처럼 이슈에 딱 붙어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관객들은 그 이슈에 대해 분노하고 슬퍼하고 자문하고 동일시하고 스스로를 대입하여 가정한다. 그 응축된 감정의 폭발하는 카타르시스 안에서 진보적 시각과 보수적 시각은 하나가 된다. 이념이나 정의가 자본의 착취로부터 대중들의 눈을 돌리기 위한 또 하나의 디스트랙션에 불과한 미국 정치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2. 논쟁


    “반미”라는 의혹의 딱지는 공개되기 전부터 도그빌을 따라다녔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것. 세상에 “개 마을”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면서 그것이 미국에 대한 3 연작 중 하나라고 한다면 미국 입장에선 마냥 기분 좋은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 영화 자체는 보편적인 인성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고 그 배경이 단지 미국일 뿐이다. 영화가 아무리 록키 산맥, 흑인 하녀, 톰 소여의 모험, 구즈베리 파이, 사과 과수원, 마피아, 토미 건, 폐광, 엘름가, 등의 미국에 관한 상징과 정서들을 노골적으로 차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배경에 대한 고증의 의무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영화의 정치성에 대한 비난에 꼭 따라붙는 911이나 이라크 전쟁 등 당시 이슈와의 연관 역시 그 사건들 조차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보편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간 행위이기 때문이다. 

    

    정작 이 영화의 “반미 성향”은 영화의 알맹이 부분이 아니라 엔딩 크레디트 부분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미국 하층민들의 내셔널 지오그래픽 풍의 사진이 지나가면서 그 위로 영국 뮤지션 데이비드 보위의 매우 시니컬한 곡 “젊은 미국인들(Young Americans)”이 흐르는 이 악명 높은 엔딩 크레디트는 굉장히 많은 신경을 건드렸을 법도 하다. 여기에 당시 칸 영화제의 도그빌 관련 프레스 정켓에서 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반미성 발언 등은 사실상 “미국도 안 가본 놈이 미국을 비판하느냐”라는 식의 악평을 자초한 모양새다. 


    특정 텍스트의 정치성을 파고드는 건 계몽주의 이후의 문학이나 영화를 평할 때 가장 쉽게 소환되는 방법론이다. 원작자가 아무리 아니라고 우겼어도 톨킨의 “반지”가 핵무기의 보조관념이라는 해석은 끊이지 않았고 피터 그린어웨이의 요리사와 도둑의 이야기는 내치적(토리와 위그의 정쟁), 외치적(영국식민사)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일견 순진해 보이는 영화 “하치 이야기”나 “철도원”조차 ‘군국주의에의 향수’라고 해석이 될 수 있는 것이 정치적인 영화보기의 결과다. 게다가 ‘이건 미국 이야기야’라고 정켓에서 대놓고 이야기하는 감독이며 도발적인 엔딩 크레디트가 오히려 이 영화와 미국사의 단면/미국의 본성에 대한 비판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가 하는 이야기는 “미시시피 버닝”이나 “로즈우드”처럼 단지 먼 나라의 안타까운 이야기라는 식으로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을 벗겨버린 프로덕션 디자인이야 말로 보편적인 이야기를 위한 장치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영화는 어느 나라의 감상자가 보더라도 자기 스스로와 자기가 속한 사회를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이다. 바로 이 영화가 “반미” 보다는 좀 더 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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