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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 Dec 20. 2022

만족(滿足)

밥풀 녹은 물과 간장

만족(滿足) :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다


#1. 왕후의 밥 걸인의 찬


창문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자그마한 빛의 조각에 허연 입김이 바스러진다

한 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컴컴한 골방엔 다른 몸의 움직임은 사치인 양 눈꺼풀만 끔벅이는 내가 누워있다.

나의 발치에는 신문지 위에 놓여 있는 신발 한쌍이 나란이다.

밥솥에 물을 부어 눌어붙어있던 밥풀을 녹여 먹은 지도 하루가 지나간다

199*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대구의 한 자취방이다


고향집에 하루 다녀오겠다며 나서는 친구를 뒤로하고 한봉 남은 라면을 끓여 무말랭이와 간장으로 허기를 채웠다

먹고 지낼 부식을 가져온다며 나선 친구는 그 후로 감감무소식이다

이틀째 포도당 공급이 끊긴 나의 뇌는 스트레스 호르몬을 마구 내뿜으며 행그리(헝그리+앵그리)상태의 욕쟁이로 나를 몰아갔다

밥솥을 열어보니 솥의 테두리로 눌어 붙어있는 밥풀들이 꽤나 있다

물을 부어 숟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눌은 밥풀들을 떼어내 끓였다

양을 늘리겠다고 물을 많이 넣은 탓에 밥풀 냄새만 나는 그냥 밥풀 녹은 물이되었다

하지만 배고픔은 그 밥풀 녹은 물과 간장을 깡그리 먹어치웠다

왕후의 밥과 걸인의 찬이 잠깐의 시장기를 속인 행복이었다면 아마도 그날의 밥풀 녹은 물과 간장은 이틀의 굶주림을 속인 행복이었을 것이다

"가난한 날의 행복"(김소운 저) 속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는 그 해 크리스마스에 녹아 있던 한 청춘의 배고픈 기억으로 남았다




#2. 안분지족


그런 까닭이었을까?

매년 크리스마스의 곁에만 서면 그날의 밥풀 녹은 물과 간장이 생각난다

가난한 청춘의 배고픔을 속이기에 충분했던 그날의 밥과 찬.

크리스마스의 은총과 곳간에서 베를 풀어 나누던 풍요의 베풂이 온 세상을 그득히 채운다 해도 그날의 밥과 찬에 비견할 수 있으랴!

지금도 만족(滿足)을 모르고 마음의 물욕이 차 오를 때면 199*년 그 해의 크리스마스를 떠 올린다




Don't cry, snowman, not in front of me~~~♪

시아의 스노우맨이 흐르는 까페의 통 창 너머로 소담스런 함박눈이 내리고 있다

까페의 창 너머로는  고등학생 즈음의 청춘들이 눈 뭉치를 서로에게 던지며 눈길을 내달리고 있다

올해의 첫눈이라 모두들 반갑고 즐거운가보다

모카의 달달함 보다 함박눈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이 더 달달해 보이는 이유일것이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눈 내리는 까페의 풍경이 꽤나 만족(滿足)스러운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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