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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Jun 11. 2023

존재와 사유의 간극

안갯속의 민낯. 김승옥 '무진기행'.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대로 소식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쓰고 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봤다.
또 한 번 읽어봤다.

그리고 찢어버렸다.

- 김승옥, 「무진기행」 중에서 -

 



  지난달부터 회사에서 <직원 독서통신 교육>을 실시한다고 공지했다.


  직원 개인이 온라인 학습센터에 접속하여 읽고 싶은 도서 1권을 신청하여 독서할 수 있다. 독서 후에는 온라인 평가에 응시하여 일정 점수 이상일 경우 학습시간을 인정해 주는 시스템이다.


온라인 학습센터 홈페이지


  ‘독서를 통해 변화하는 시대 흐름을 읽고 융․복합적 사고를 개발하여 직무능력 향상을 도모한다.’ 라며 거창한 목표를 밝혔지만, 나는 그것까진 모르겠고 원하는 책 1권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적극 동참했다.


  온라인 학습센터에는 많은 책들이 구비되어 있었지만 정작 내가 찾는 몇몇 책들은 없었다. 아마 가격 상한선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무슨 책을 골라야 하나. 이런저런 고심 끝에 한 권을 선정해 Enter키를 눌렀다.




  그리고 몇 주 뒤, 내 책상으로 보내진 책은 '곽아람'의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였다. 예전에 보았던 그녀의 책 [그림이 그녀에게]무척 마음에 들었기에 그녀의 다른 책도 보고 싶어졌다.



  이번 도 그녀의 스타일대로 그녀가 읽었던 책과 그때 떠올랐던 그림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30개의 작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전히 글 속에는 그녀의 인생방식과 내면에 숨겨 둔 어린 소녀의 결핍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외로운 사람은 편지를 쓴다"는 소제목으로 소개한 '김승옥'의「무진기행」을 보고 반가웠다. 그리고 씁쓸했다. 


  입속의 피처럼 비릿한 오래전 기억이 먼 과거로부터 소환되었다. 그것은 나약함과 체념이었으며 현실에 대한 순응이었다.





  「무진기행」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 1학년, 낡고 눅눅한 대학 강의실에서였다. 1학년 교양필수였던 ‘대학국어’ 시간의 그 지루했던 강의실이 떠오른다. 한껏 기대했던 내 대학생활은 3월의 을씨년스러운 날씨만큼이나 어수선했다.


  누구의 시처럼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갔지만 수업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공간적 이동만 했을 뿐 그 알맹이는 그대로인 진부한 시간! 대신 나는 두툼한 국어교재 뒤편에 수록된 현대 단편소설을 읽었다.


  「무진기행」은 1964년 작가 '김승옥'23살 때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김승옥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며 한국 문학계에서도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무능하고 무기력한 현대인을 상징하는 인물인 주인공 "윤희중(이하 '그'라 칭함)" 이 안개가 명물이라고 소개되는 무진이라는 곳으로 여행을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2박 3일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인 '그'는 지금 무진으로 향하고 있다. 몇 년 전 제약회사 회장의 과부 딸과 결혼하면서 일약 회사의 중역이 되었다. 이제 그는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에 전무이사직에 오를 안건이 상정된 이사회를 앞두고 있다. 그 일로 신경이 곤두선 '그'는, 휴식이 필요할 것 같다며 잠시 고향에서 재충전할 것을 권하는 아내의 말에 무진으로 가고 있다.


  '그'에게 무진은 '출발'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았다. 대학을 다닐 때 6·25 전쟁이 발발하는데 남과 북 모두의 군대에 징집을 피하고자 홀어머니에 도움으로 무진의 골방에 숨어 있었다. 폐병에 걸렸을 때는 일 년여 동안 바닷가 근처 집에 세를 들어 건강을 회복하는 등 '그'에게 무진은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곳이었다.


  무진에 도착한 날 저녁, '그'는 무진 중학교 동기인 세무서장 '조'의 집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음악 선생인 하인숙(이하 '그녀'라 칭함)을 만나게 된다.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그녀'는 무진의 심심함, 무료함에 지쳐있었고, '그'에게 서울에 데려가 달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그녀'에게서 '그'는 지난날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고, 다음날 함께 바다에 가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지게 된다.


  다음날, '그'는 '그녀'와 함께 바닷가 근처의 쭉 뻗은 방죽 위, '그'가 무진에서 잠시 머물렀던 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녀'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며 연민에 가까운 사랑을 느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그녀'를 서울로 데려오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 약속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아내로부터 전무 자리를 위한 긴급회의에 참석하라는 전보가 왔기 때문이다. 서울로 갈 준비를 하면서 '그녀'에게 사랑 확인과 서울에서 만날 것을 약조하는 편지를 쓰지만 이내 찢어버린다.  '그녀'를 뒤로한 채 결국 다시 무진을 떠나는 버스에 오르게 된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듯 보였던 주인공은 하인숙과 이별을 택하며 자기 자신을 영영 상실하는 쪽을 택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겠노라고 다짐하고 무진을 떠난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 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 김승옥, 「무진기행」 중에서 -


  「무진기행」에는 두 개의 공간이 존재한다. 하나는 '서울'이라는 일상의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무진'이라는 탈일상의 공간이다.


「무진기행」에는 두 개의 공간이 존재한다.


  아내와 제약회사 전무 자리가 있는 서울은 세속적이지만 현실적인 가치의 중심이다. 이에 비해 안개와 바다, 자살한 여인의 시체와 하인숙의 노래가 있는 무진은 몽환적이고 탈속적인 공간이다.


  무진은 아름답다. 하지만 아름다워도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공간이다. 무진은 2박 3일로 족한 것이다. '그'는 이미 전쟁과 실직과 실연의 쓰라림을 맛본 30대의 성년이기 때문이다. 그는 무진과 하인숙의 아름다움을 알면서도 서울과 아내에게로 가야 한다. 무진은 꿈이지만 서울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삶은 목적과 방향이 있는 어느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이야기가 여기에, 다른 어디도 아닌 여기에 있는 것처럼 기억하고, 배가 물가에 닿게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처음 의도한 목적지와 실제 도착점과는 많은 간극이 있다.

우리 삶은 목적과 방향이 있는 어느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더 나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만약 현재 위치에 이르렀을 때, 여기가 우리가 가려던 곳이거나 적어도 가려는 길 위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뿌듯할까.


  그래서 누구나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이야기를 다시 쓰고 싶어 한다. 우리의 노 젓는 행위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전체 이야기에 논리적이고 의도된 요소로 딱 들어맞게 말이다.


  뛰어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은 책들을 보면, 성공한 듯 보이는 사람들에게 있어 현재의 삶은 어릴 때부터 꿈꿔온 유일한 꿈이라고 말하는 것을 종종 본다. 현재 어느 분야에서 성공했든 그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이 원래부터 꿈이었다고 말한.


  진실일 수도 있다. 다만 그 밖의 모든 꿈을, 길러지지 않고 시들다 사라져 버린 꿈을 지워버릴 수 있다면 말이다.  삶을 이루는 무의미하고 혼란스러운 우연들을 다 잊어버리고 나중에 모두 솎아내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만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원래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었을까. 


  나의 '무진'은 어디였을까.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어디인가.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 김승옥, 「무진기행」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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