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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Feb 15. 2024

모퉁이 너머 길엔

<빨강머리 앤>


“......
 여기서 최선을 다해 살면 그에 따른 대가가 주어지리라 믿어요. 퀸스를 졸업할 땐 미래가 곧은길처럼 제 앞에 뻗어 있는 것 같았어요. 그 길을 따라가면 중요한 이정표들을 수없이 만날 것 같았어요.

그런데 걷다 보니 길모퉁이에 이르렀어요. 모퉁이를 돌면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 가장 좋은 게 있다고 믿을래요. 길모퉁이도 나름의 매력이 있어요, 아주머니. 모퉁이 너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하거든요.
.....”


- 소설 《빨강머리 앤》 중에서 -



  이 작품은 캐나다의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지은 소설로 1908년 출판되었다. 원래 제목은 「초록지붕집의 앤」이었지만 일본에서 이 소설을 번안하면서 제목이 '빨강머리 앤'으로 바뀌었는데,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빨강머리 앤」으로 계속 출판되고 있다.


  작가 몽고메리는 이 캐릭터 하나로 많은 연작 소설을 썼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소개되지 않았지만 앤의 유년기, 중년기, 노년기를 다룬 시리즈가 계속 이어졌다. 전 세계적으로 50개국 이상에 번역되어 1억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이다.




  나는 원작보다 TV판 애니메이션을 통해 앤을 먼저 알게 되었다. 일본의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이 연출과 각본을 담당한 이 애니메이션은 1979년에 일본 후지 TV를 통해서  '세계명작극장' 시리즈 50부작으로 방영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거의 40년 전인 1985년에  '세계명작만화' 타이틀이 붙은 채 KBS2에서 처음 방영됐다고 한다. 이 애니는 이후에 KBS 외 다른 방송사에서도 수차례 재방영되는 등 빨강머리 앤을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림체, 클래식 BGM과 원작 소설의 대화를 상당수 살린 연출, 그리고 편안한 목소리의 내레이션을 삽입한 다큐멘터리적 요소까지 그 모든 것이 평화롭게 이어지는 명작이었다.


  사실 애니메이션 속에서 앤은 항상 열정에 차 있고, 그녀에게 일어난 슬프고 비극적인 일도 항상 긍정적으로 마무리되어 캐나다의 전원생활이 꽤나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원작을 읽어보면 당시 생활상이 더 자세하게 드러나면서 앤의 고난기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말이다.




  몇 년 전 난 딸애의 생일을 기념하여 '책'을 선물하기로 생각했다. 초등학생이 되는 시기라 선물도 좀 더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딸애의 성향상 여자 아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작품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이런저런 책들을 고려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최종 결론은 「빨강머리 앤」이었다. 



  워낙 유명한 책이다 보니 여러 출판사에서 나온 각기 다른 버전들이 있었다. 평소 딸애는 그림책을 좋아했기에 그쪽으로 눈을 돌리다가 아주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했다.


  예전 내가 즐겁게 보았던 애니메이션 장면을 책 속에 아주 많이 넣은 책이 있었다. 그 책을 찾고는 얼마나 기뻤는지, 딸애가 반짝이는 눈으로 그 책을 읽는 모습을 상상하니 아빠로서 행복했다.  


  생일 전에 미리 책을 사 속표지에 짧은 축하인사도 적었다. 생일날, 놀라게 하려고 ‘짠’하고 선물을 주었는데 딸애의 반응은 내 기대와는 달리 완전 시큰둥이었다.


  우선 생일 선물로 책을 받는 게 싫었단다. 게다가 자기와는 상의도 없이 아빠가 원하는 책으로 결정해서 기분이 상했단다. 책도 너무 두껍고 무엇보다도 아빠가 그렇게 칭찬해 마지않는 그 애니메이션 삽화가 딸애가 보기엔 그림도 안 이쁘고 여주인공도 너무 못생겼다나.


  딸애가 분명히 좋아할 거라고 잔뜩 기대했는데 뜻밖의 냉대에 난 적잖이 실망했다. 그래서 이 책이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이 읽혔는지, 여주인공이 나중에는 무척 예뻐지고 행복하게 된다고 계속 설명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아빠의 강요로 느꼈는지 지금까지도 일부러 읽지 않고 있다. 아빠의 마음에 대못을 박아 놓고는 유유자적하게.





  그 당시엔 아직 어린 딸애를 위해 자기 전에 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직접 읽게는 못했지만 듣다 보면 흥미를 느낄 거란 희망을 갖고 매일 밤 꾸준히 들려주었다. 다행히 들려주는 빨강머리 앤은 싫어하지 않았다.


 

  캐나다의 애번리 마을에서 농사일을 하는 '매튜'와 그의 누이 '마릴라'. 농사일을 위해 사내아이를 입양하기로 하지만, 막상 그들 집에 오게 된 아이는 빨강머리의 주근깨가 가득한 '앤 셜리'라는 여자아이였다.


  수다쟁이에다가 엉뚱한 상상을 즐기는 천진난만한 소녀 앤은 새로운 가족과 사람들, 그리고 낯선 환경에서도 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점차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나간다.


  그런데 앤이 숙녀가 되고 행복한 일들이 일어나려는 그때 매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앤과 마릴라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혼자 남은 마릴라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마릴라 혼자 농장을 꾸려가는 건 불가능했다.


  앤은 장학금을 포기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마릴라는 앤에게 그런 희생을 시킬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앤은 마릴라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길에 모퉁이가 나타났으니 그 모퉁이를 돌아 다시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이야기였다. 이렇듯 앤은 어느새 발랄한 소녀에서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딸애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불현듯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여전히 앤을 좋아하지만 지금은 앤만큼이나 매튜와 마릴라 역시 애정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아내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어렸을 때엔 앤과 다이애나만 보였는데 부모가 된 후 다시 본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주인공은 마릴라와 매튜이다. 어린 마음에 마릴라는 너무 고지식하고 야박해 보여 싫었다. 하지만 제 마릴라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수다쟁이에 사고뭉치인 앤은 아마 지금 기준으로는 '주의력 결핍 또는 과잉행동장애(ADHD)'인 진단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매튜와 달라서 그렇지 마릴라는 따뜻하고 올곧은 사람이었다.


  마릴라와 매튜는 환상적인 부모의 조합이다. 매튜는 아이의 모든 것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칭찬을 입에서 내려놓지 않는다.  마릴라는 사랑을 잘 표현하지는 못한다고 하면서도 당시 사람들의 선입견 앞에서 당당하게 앤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런 두 사람의 애정 어린 보살핌 덕에 앤은 밝고 건강하게, 뒤늦게 발견한 학구열을 불 붙이며 자신의 꿈을 찾아 힘차게 나아갈 수 있었다.





  앤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말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빨강머리"였다. '린드 부인'과의 첫 만남도, 나중에 결혼까지  '길버트'와의 흑판 사건도 모두 그 말 때문이었다.


  빨강머리는 앤에게 있어 마녀의 '저주'이자 무의식 '치욕' 같은 것이다. 그러던 그녀가 초록지붕 집에서 사랑을 받고 친구들과 우정을 쌓으며 성숙해지자 어느새 그녀의 머리 색이 아름다운 적갈색으로 변한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빨강머리가 있다. 그런데도 잘 살아갈 수 있다. 어느 길로 갈지 미리 알 수 없고 불현듯 모퉁이들이 나타나는 게 인생이지만 그 모퉁이들을 돌아 나오는 길에서 두려워하기보다는 새로운 기대와 꿈을 품고 살고 싶다.


  꿈 없는 삶이 의미 없다는 건 아니다. 허황된 꿈이라면 꾸지 않는 게 차라리 낫다.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 꾸던 꿈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되지도 않는 꿈을 좇는 삶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가. 그래도 꿈꿀 수 있는 때가 윤기 있는 인생이지 않을까.


  최근에 <빨강머리 앤>을 다시 읽으며 떠올린 생각들이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나는 아직까지 앤처럼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나와 같은 고지식한 어른들에게도 앤은 여전히 꿈을 가지라고 응원을 보낼 거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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