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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임나무 Jun 03. 2023

비처럼 추억처럼



|비가 내리다|



2주 내내 비가 내리고 날이 흐리기를 반복했다. 햇빛이 반짝 나는 날은 단 며칠이었다. 어느 날은 소낙비처럼 굵은 비가, 때로는 소리 없이 보드라운 비가 땅을 적셨다. 소나기 같은 비는 시원함을, 조용조용 내리는 비는 몽글몽글 마음을 간질이는 힘이 있어 좋았다. 하지만 먹구름이 겹겹이 쌓여 어두컴컴한 날은 우울한 기분에 햇볕이 그리워졌다. '비가 오는 날은 어울리는 음악을 들어야지.'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이 제격이다.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가사를 음미하며 감성이 폭발한다. 옛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Photo by Berkin Üregen on Unsplash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쏴아아'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여고시절을 회상한다. 누군가는 교복이 싫다지만 나는 좋았다. 흰색 셔츠, 회색 치마와 회색 조끼, 초록색 재킷이 단출하면서 세련미가 있어 맘에 들었다. 활달한 것 같기도 하고 조용하기도 한 A는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밖으로 나가 비를 흠뻑 맞고 돌아오곤 했다. 젖은 교복 치마는 짙은 회색이 되었고, 머리카락은 얼굴에 착 달라붙어 있었으며, 머리칼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이 강렬해 지금까지도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일탈이었을까 해방이었을까. ‘쇼생크 탈출’ 주인공 모습과 오버랩된다. 팔을 활짝 펼치고 쏟아지는 비를 껴안으며 자유를 만끽하는 앤디처럼 A는 누구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방감을 누린 듯했다. 대리만족을 느꼈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노라면 A가 다시금 떠오른다. 빗속에 나를 내맡기고 흠뻑 젖으며 얻는 원시적 해방감을 꿈꿔본다. 



|감상과는 거리가 먼 현실|



마냥 감상적이기만 하면 좋으련만 현실 속 비는 그러하지 못하다. 비 오는 날 외출은 이래저래 불편하다. 걸을 때마다 튀는 빗물이 바짓단을 적시는 것은 상쾌하지 못하다. 비 오는 길을 걷다가 획 지나가는 차 때문에 물벼락을 맞은 날은 재수가 오지게 없는 날이다. 나도 모르게 'xx' 하지도 못하는 욕을 속으로 중얼거린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올 때 수많은 우산 속에서 내 것을 찾아내는 건 좀처럼 쉽지 않다. 찾지 못해 난감한 경우도 있다. ‘누군가 실수로 들고 갔겠지’ 애써 위안하지만 썩 유쾌하진 않다. 비 오는 날 누군가와 함께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애매하기도 하고 불편한 일이다. 나란히 걸으면 커다란 두 우산이 부딪혀 만들어내는 빗방울에 젖기도 한다. 지그재그 앞뒤로 걸으면 왠지 모를 거리감이 생기는 것 같아 마땅치 않다. 따라가는 쪽이건 앞서가는 쪽이건 거리감이 어쩐지 불편하다. 연애를 할 때는 그 거리감이 싫어 아예 우산 하나를 접고 큰 우산 하나를 공유하며 거리를 걸었다. 한 우산 아래에 들어가는 친밀감이 좋았다. 설령 어깨에 비를 맞을지언정 함께해서 따스하고 든든했다. 비 오는 날이 마냥 싫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추억을 소환하다|



짜증 날 때도 우울할 때도 있지만 비 오는 날만 누리는 낭만이 있다. 아늑한 집안에서 ‘투두둑 투두둑’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시름이 사라진다. 세상 속 잡음을 잠재우듯이 내 마음속의 잡음도 빗소리에 묻혀간다. '투덕투덕' 떨어지는 빗소리는 뭉글뭉글 지난 기억들을 떠오르게 한다. “난 오늘도 이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요" 김현식의 노래가 계속 귓가를 간질인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아침, 갑자기 쏟아붓는 빗소리에 한동안 추억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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