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장에 담긴 사연
나의 기원은 엄마가 돌아가신 날 지인들에게 보낸 부고장에 담겨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평소 인사만 하고 지내던 직장 동료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 분은 내가 보낸 부고 문자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사연이 많은 부고장이야. 엄마가 참 고생 많으셨겠어.”
訃告
故유옥순(83세/여)
2023년 1월 6일 별세
상주
자 권정무, 권정일, 박범순
녀 박미경, 박선화, 박후자, 박수경
부고장에 담긴 사연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 써야 한다. 아빠는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오로지 엄마에게 들은 말에만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한국전쟁 때 열 살이었다고 했으니 호적에 적힌 것과는 다르게 1941년생이다. 엄마 밑으로 남동생이 셋, 여동생이 셋이나 있어 열여섯 살에 첫 번째 결혼을 했다. 엄마의 첫번째 남자는 엄마를 때린 적이 자주 있었나 본데 엄마는 유독 그날 이야기만 했다. 그날은 첫 번째 남자가 종이로 된 큰 돈을 받아 온 날인데 주머니에 두었던 돈이 손과 함께 딸려 나와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생겼다. 자신의 실수로 돈이 날아간 줄 모른 첫 번째 남자는 방문을 잠그고 엄마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발가벗긴 후 때렸다. 그렇게 엄마를 때린 남자가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다 마당 한 켠에 있는 빗자루에서 펄럭거리는 지폐를 발견하게 된다. 피우던 담배를 던지고 그 돈을 들고 집을 나간 첫 번째 남자는 엄마가 잠들 때까지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런 속에서도 엄마는 열일곱 살에 첫 아들을 낳았다. 그 후에도 정확히 2년에 한 번씩 아들, 딸, 아들을 내리 낳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둘째와 셋째는 하늘나라로 가고 넷째로 태어났지만 둘째가 된 아들이 백일쯤 되던 때 엄마는 과부가 되었다. 첫 아들은 문중에서 놓아주지 않아 백일 된 둘째만 업고 버스 타고 걷기를 밤낮으로 해서 친정으로 돌아왔을 때가 겨우 스물다섯 살이었다.
먹을 것 없이 가난한 살림에 입 덜려고 일찌감치 시집보낸 큰 딸이 혹까지 달고 다시 친정으로 왔으니 외할머니 구박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도 과부인데 딸까지 과부가 되었으니 더 보기 싫었으리라. 외가 옆에는 남씨 아줌마 여동생이 살고 있었다. 이 남씨 아줌마는 훗날 내 법적 엄마가 되는 사람인데 남씨 아줌마는 언제 결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남편이 사십이 다 되도록 아이가 없었다. 남씨 아줌마 자신을 대신해 아들을 낳아 줄 사람을 물색하던 차에 안동에서 살고 있는 여동생 옆집에 아들을 셋이나 낳은 적 있는 엄마 소식을 접하게 된다. 남씨 아줌마는 자신의 여동생을 통해 외가에 쌀 한 가마니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강원도 원주에 과수원 크게 해서 돈 많고 나이도 많은 남자에게 살러가라며 어머니를 보냈다.
그렇게 엄마는 두 번째 남자를 만났다. 둘째 오빠를 업고 발이 퉁퉁 붓도록 걸어서 찾아간 곳에는 돈 많고 나이 많은 남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두 번째 남자 곁에는 아내인 남씨 아줌마가 있었다. 그 와중에도 엄마는 임신을 했고 남씨 아줌마의 시기, 질투 속에서도 정확히 2년 터울로 아들과 딸을 내리 낳았다. 이때 두 번째 남자와 남씨 아줌마는 매일 싸웠다고 한다. 이유는 두 번째 남자가 남씨 아줌마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약속은 한 여자에게는 눈물겹게 고마운 일이지만 한 여자에게는 평생 가슴에 남을 배신감을 안겨줄 수밖에 없는 일이다. 만약 두 번째 남자가 남씨 아줌마와 한 이 약속을 지켰다면 아마 나는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의 두 번째 남자인 아빠와 남씨 아줌마는 엄마를 데려오면서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아들을 낳으면 친정으로 돌려보내기로! 아빠는 그러마고 약속을 했으나 엄마가 아들을 낳고 이어서 딸을 낳았는데도 엄마를 친정으로 보내지 않았다. 아빠는 내 아이를 낳아 준 여자를 버릴 수 없다 하고 아빠의 아이를 낳지 못한 남씨 아줌마는 자신이 버려질까 봐 겁이 났는지 아빠의 재산 중 많은 양을 챙겨 동네 젊은 남자와 함께 그 마을을 떠났다. 그렇게 떠나면서 호적 정리를 하지 않아 남씨 아줌마는 육 남매의 법적 엄마가 되었다. 그 덕분에 우리 엄마는 오빠 둘의 법적 엄마로 남아 있을 수 있게 되기도 했지만.
아빠는 엄마에게 아들 하나는 외로우니 아들 하나만 더 낳아달라고 했고 엄마는 남씨 아줌마가 떠난 후 딸 쌍둥이를 낳았다. 아빠는 그 쌍둥이의 동생 이름을 ‘후자’라고 지으며 아들 하나를 더 간절히 바랐다. 그에 반해 더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던 엄마는 마침 동네에서 출산율 줄이기를 위해 나누어준 피임약을 먹기도 했다. 엄마가 먹은 약은 임신을 막지 못했고 시간을 늦추는 역할만 했다. 쌍둥이 언니를 낳고 5년 후 결국 내가 태어났으니까. 아빠 소원도 이루어졌는데 내가 태어나고 2년 후 아빠가 그렇게 바라던 둘째 아들도 태어났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아빠의 욕심이었는지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다. 나를 태어나게 해 준 고마운 내 동생은 스물아홉 살에 아빠 곁으로 갔다. 그렇게 바라던 아들이라서 그런가 너무 빨리 데려갔다.
사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엄마가 돌아가신 날 부고장은 이렇게 보내져야 했다. 살아 계실 때 막내가 다시 우리와 함께 하기를 바랐던 엄마 소원도 담고, 나를 태어나게 한 사연도 담기게!
訃告
故유옥순(83세/여)
2023년 1월 6일 별세
상주
자 권정무, 권정일, 박범순, 故박정순
녀 박미경, 박선화, 박후자, 박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