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매일매일 하고 싶은 숙제
저번 주에는 글을 쓰지 못했다. 매주 세 편씩은 쓰자고 마음먹었다. 일주일을 둘로 나누고 하루는 나에게 쉬는 시간을 주며 결정한 숙제였다. 그렇게라도 자꾸 써야지 않겠느냐고 마음먹었다. 저번 주에는 몸살이 찾아왔다. 머리에 들어찬 몸살 기운은 계속 나를 괴롭혔다. '나는 왜 글을 쓰고 있는 거지?'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 거지?'로 시작된 질문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너무 고맙게도 하루를 일 분으로 쪼개서 살아야 할 만큼 바빠서 그 핑계로 노트북을 외면했다. 글을 써도 일주일은 가고 글을 쓰지 않아도 일주일은 간다. 그런데 헛헛한 이 마음은 뭐라 표현해야 할까?
10월 마지막 주 글쓰기 수업은 특별했다. 그동안 에세이를 쓰다가 마지막 두 번의 수업은 시를 쓴다는 것이다. 동시를 읽는 것도 힘들어서 허덕거리고 있는데 시라니. 그동안 시를 읽으려고 엄청 노력해 보았다. 고등학교 때는 좋아하는 선생님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읽었다. 그 시집이 누가 쓴 것인지 어떤 시가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시를 읽었다기보다 시를 이용했다고 봐야겠다. 그러다 하상욱의 서울시라는 시집을 읽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싶어 놀랐고 이렇게 짧아야 읽어낼 수 있구나 싶어 당황했다. 그 이후에도 고명재 시인의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이라는 시집이 나오자마자 1쇄가 다 팔리고 2쇄를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나도 한 권 샀다. 두 편 읽었던가? 도저히 안 넘어가서 결국 그대로 두었다.
그런데 시를 읽고 쓰기도 해야 한다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내 책장에 시집이 몇 권이나 있나 찾아보았다. 내 기억에는 이 두 작가의 책이 전부여야 하는데 열 권의 시집이 있었다. 그리고 발견한 '시 읽는 법' 내가 이런 책도 샀던가? 책등에 적힌 부제 '시와 처음 벗하려는 당신에게'가 눈에 들어왔다. 시를 읽으려고 나름 애를 쓰기는 했구나 이런 책도 사 두었던 것을 보면 말이다. 일단 들고 앉았다. 시 읽는 법을 어떻게 설명해 줄지 궁금했다. 24쪽부터 시가 도대체 뭡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글이 나온다. 작가는 19세기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이 한 말과 이성복 시인이 한 말, 이시영 시인의 인터뷰를 통해 시를 설명한다. 그러다 76쪽에 도착해 밑줄을 긋고 따라 쓰기를 했다.
'시의 힘이란 이런 거라고 생각해요. 나의 일상이 너의 일상이기도 함을 깨닫는 것. 내 안에 갇힌 시선을 세상으로 열어서 내 고통만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까지 보게 하는 것.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나의 고통을 객관화하는 것.'
글이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이나 느낌 같은 것을 글로 써 내려간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모자란다. '글'이라는 말 하나로 '글감', '글공부', '글귀', '글꼴', '글눈', '글동무', '글뒤주', '글말'. '글방', '글쓰기', '글씨', '글씨본', '글씨체', '글월', '글자', '글자본', '글재주', '글짓기'까지 태어나게 했는데 뭔가 더 의미가 있어야 할 것 같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다. 글이 도대체 무엇이라서 5시 19분 알람을 맞추게 하고 매일 쓸거리를 찾아 헤매게 하는 걸까?
운동으로 찾아온 몸살이 익숙해지고 더 또렷해진 머리에 들어찬 몸살은 아직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몸살은 푹 쉬는 게 약이라 일주일을 쉬었다. 그렇게 안 쓰면 내 게으른 몸이 잠 속에서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또 5시 19분에 깼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쓴다. 지금 글은 내게 숙제이다. 글을 왜 쓰고 있는지 찾기 위한 숙제. 매일매일 써야 하는 숙제. 숙제처럼 쓰다 보면 언젠가 내게 답을 줄지도 모르니 일단 쓰고 또 써볼 밖에. 내 일상이 다른 사람의 일상이기도 함을 깨닫고, 내 안에 갇힌 시선을 세상으로 열어서 나와 타인의 고통을 보게 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내 고통을 객관화하는 힘이 생기게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