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대답해야 하는 질문 중 하나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이다.
지금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른 삶을 살기 원한다면 어떤 삶이 자신이 원하는 삶인지 대답해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삶은 자신을 제대로 이해할 때 그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묻게 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들을 잘할 수 있는가? 어떤 점들을 특히나 힘들어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해 나가며 자신에 대한 이해를 높일 때 비로소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믿는다. 나에 대해 더 잘 탐구하기 원할 때 참고로 삼으면 좋을 내용이 있다. 바로 조하리의 창 (Johari's window)이다.
조하리의 창 (Johari's window)
1955년 심리학자 조셉 루프트(Joseph Luft)와 해링턴 잉햄(Harrington Ingham)이 개발한 조하리 (Joseph + Harry) 창은 인간의 자기 인식과 대인 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모델이다.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상호 작용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고안된 이 모델은 4 사분면 창으로 표시되며, 각 사분면은 개인의 자기 인식의 다른 측면을 나타낸다.
우선 ‘열린 창’(Open)은 나 자신도 알고 타인도 아는 일종의 공공영역을 뜻하며 ‘숨겨진 창’(Hidden)은 자신은 알지만 타인은 지각하지 못하는 사적인 영역을 가리킨다. 이와 반대로 ‘보이지 않는 창’(Blind)은 타인은 알지만 자신은 모르고 있는 부분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미지의 창’(Unknown)은 자신과 타인 모두 인지하지 못하는 영역으로 ‘암흑의 창’이라고도 불린다. '미지의 나'는 '무의식의 나'에 해당된다.
이 4 사분면에서 자신이 모르는 영역은 blind와 unknown 영역이다. 우리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겠다고 느끼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과 관련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 해당하는 나를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Blind window와 Unknown window에 속해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 나의 여정을 소개해 볼까 한다.
타인은 알지만 나는 모르는 나
먼저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영역부터 살펴보자. 타인은 알지만 '나는 모르는 나'는 '암흑의 창'에 존재하는 '나' 보다는 상대적으로 쉽게 발견될 수 있다. 이 부분에 해당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다면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어울려 봐야 한다는 생각 했다. 타인이 그 답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학계를 벗어나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그들로부터 나도 모르고 있던 '나'에 대해 듣게 되었다. 어느 분야의 사람들과 교류하느냐에 따라 이야기들이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공통적으로 듣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그들과 상호작용할 때 에너지가 상승되는 사람이었다. 랩에서 실험하고 논문을 쓰느라 컴퓨터와 혼자 씨름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잊고 있던 나의 모습이다. 특히 다른 이들의 강점을 빨리 발견하고 그들에게 그 점을 인식시킴으로써 격려하는 일을 잘한다고들 했다. 공통적으로 받은 이런 피드백들은 나 자신은 모르고 있었어도 '나'라는 사람의 코어를 구성하고 있는 듯했다. 그로 인해 내가 가지고 있는 핵심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었다. 관심영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내 모습을 타인의 시각을 통해 발견하는 과정 또한 흥미로웠다. 특정 영역에서 보이는 또 다른 자아를 찾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내 안에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를 깨달을 수 있게 되니 나에 대한 이해가 한층 더 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직접적으로 사람들과 대면하는 것을 싫어한다면 닉네임을 사용하며 세상과 소통해 볼 수 있다. 블로그, 인스타그램, 브런치, 유튜브 등의 플랫폼을 통해 나라는 사람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 공간에서 나도 모르게 반복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들이 있다. 말이나 글에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의 어떠함'이 배어 나오기 마련이라 그것을 통해 우리의 오디언스들은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지 발견해 낼 수 있다. 그리고 그들과 충분히 소통하고 있다면 그들이 댓글로 말해 줄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어떠한지... 예전에는 이런 공간들에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남아있는 생을 의미 있게 살기 위한 물음들의 끝에는 늘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는 결론이 있었다. 이것을 깨닫고부터는 생각이 달라졌다. '나' 자신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공간에 '나'라는 사람을 선보여야 한다고 말이다.
타인도 나도 모르는 미지의 '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나'의 모습. 이런 '나'는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미지의 '나'는 무의식의 '나'와 같다는데 집중하니 해결방법이 보였다. 언어를 사용하는 일련의 행위들은 모두 우리의 의식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므로 무의식에 접근하는데 한계가 있다. 무의식에 접근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그림이다. Edith Krammer는 그래서 '미술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었다. 미술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 속 문제점들에 접근할 수 있게 되고 그것들을 미술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승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로 생각이 일어나고 그 생각을 발화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의식이 개입되며 원초적인 생각들에 변형을 가져온다. 그에 비해 미술이라는 행위에 몰입할 때 우리의 무의식 속 자신의 모습이 작업물에 투영되어 나타난다. 그 작업물은 외부 세계에 객체로 존재하기에 그것을 보며 내 안에 어떠한 모습들이 있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내 조카의 경우가 이런 상황을 극적으로 체험하게 했는데 조카는 엄마가 막내를 출산하고 아이를 돌보느라 바빠지자 울고 떼를 쓰는 시간이 늘어났었다. SOS를 청해 온 동생에게 난 미술심리치료를 받아볼 것을 권했다. 원장님과 상담하는 사이 조카는 엄마를 그렸다고 그림을 보여줬다고 한다. 동생은 엄마라고 자신을 그려 놓은 것을 보라며... 만화 주인공처럼 예쁘게 그려 놓은 눈망울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내 눈에는 이상한 점이 보였다. 그림 속 엄마에게는 팔이 없었던 것이다. 조카가 엄마를 떠올릴 때, 엄마에 대한 자신의 인식이 그 그림 속에 투영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조카 눈에는 엄마가 다른 동생들을 돌보느라 너무 바빠 자신을 돌볼 수 있는 팔이 없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림을 그린 사람에게 물어봐야 한다. 미술심리치료사는 그림에 투영된 내용을 중심으로 내담자에게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질문할 뿐이다. 일반 성인이라면 이렇듯 미술을 활용하여 무의식 속 '나'에 대해 알아가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