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누도 잇신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영화는 모두 "괴물의 집에 평범한 사람이 찾아가면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그의 영화는 언제나 이러한 이질적인 만남으로부터 출발한다. 평범한 대학생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는 하반신 장애를 가진 조제(이케와키 치즈루)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영화는 츠네오와 조제의 만남부터 이별까지를 담담히 따라간다. 감독은 그들의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영화는 로맨스가 아닌 지점을 비춘다. 한 남자가 자신과 너무나 다른 여자를 만나고 서로 사랑하고 상처 주면서 성장해간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그들의 성장 이야기이다.
영화의 첫 장면, 조제와 츠네오가 떠났던 여행의 스냅숏이 이어진다. 츠네오가 사진들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것은 실제로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과 비슷해 보인다. 사진은 그 시간들 전부를 담아낼 수는 없기에 우리는 퍼즐을 맞추듯 사진을 시간 순으로 놓고서 사이사이 빈틈을 메꾸어 간다. 바다의 소리, 함께 했던 사람의 목소리, 그 순간 느꼈던 감정 같은 것들. 24 프레임의 HD 영화가 아니라 조각조각 나눠진 이미지와 어렴풋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루는 불완전한 영상이 사랑의 기억 그 자체가 아닐까.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 붕 떠버린 시간은 외롭고 정적이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그 시간을 새롭게 해석하고 채워나갈 수 있다. 이후 이어지는 영화는 아마도 재해석된 츠네오의 기억이다.
마작 게임방에서 일하는 츠네오는 손님에게 유모차 끄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유모차 속에는 돈뭉치가 있네, 마약이 있네,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할머니와 유모차는 UFO나 외계인 같은 미지의 존재이다. 츠네오는 손님의 개를 산책시키러 나갔다가 언덕을 굴러내려오는 유모차를 마주한다. 할머니의 부탁으로 담요를 걷은 츠네오는 유모차 속에서 식칼을 들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조제의 세계와 만난다. 조제는 어릴 때부터 걷지 못한다. 조제의 할머니는 걷지 못하는 그녀를 부끄럽게 여기고 세상으로부터 숨긴다. 때문에 조제는 현실과 동떨어져 자라게 되는데 그런 그녀에게 유모차 산책은 세상과 접촉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마저도 담요에 숨어 살짝 엿볼 뿐이다. 하지만 츠네오가 담요를 걷은 순간 조제는 식칼을 휘두르며 강렬하게 츠네오의 세계로 파고든다.
조제를 바래다주며 밥을 얻어먹게 된 츠네오는 의외로 맛있는 식사에 놀란다. 여기서 그는 조제에 대한 벽을 한 단계 넘는다. 그녀가 진정 사람을 해하는 ‘괴물’이라면 그렇게 맛있는 계란말이를 만들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또 그녀는 살모넬라균 때문에 배탈이 날 수도 있다며 대학생이 그것도 모르냐고 비아냥거린다. 이런 그녀의 당찬 모습은 츠네오에게 호기심으로 다가온다. 조제는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온갖 책들을 읽는다. 그 책들이 독특한 조제만의 세계를 만든다. 사강을 읽으며 조제가 되기를 꿈꾸고 베르나르와의 사랑을 꿈꾼다. 다만 꿈꿀 뿐 그녀는 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한다. 조제의 할머니가 그녀를 높은 성에 가두고 격리시키기 때문이다. 너는 고장 난 물건이고 남들과 다르니 똑같이 살려하지 말라며 그녀를 윽박지른다.
한편 츠네오는 진지한 연애는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학교 친구와 사랑 없이 몸을 섞고 대학의 퀸카 카나에(우에노 주리)에게 작업을 건다. 부상 때문에 좋아하던 럭비를 그만둔 것에 대해서도 ‘난 생각해서 소용없는 일은 생각 안 하는 편’이라고 말한다. 애초에 모든 것들에 그다지 큰 열정이 없는 그가 조제에게만큼은 꽤나 열정을 보인다. 고향에서 보내준 음식을 갖다 주고 밥을 얻어먹고 그녀가 좀 더 편할 수 있도록 복지제도를 알아보기도 한다. '맛있는 밥'에서 시작한 열정은 ‘그녀'를 향한 열정으로 전환된다. 그렇게 츠네오는 조제를 자신의 세계로 끌고 나오기 시작한다.
사랑은 결국 서로 다른 두 세계의 만남이다. 20년이 넘게 다르게 살아온 두 개의 세계가 충돌하는 것과 같다. 둘은 결국 부딪힌다. 츠네오가 그녀를 한 여자로 바라본다 한들 츠네오의 세계에서 조제는 그저 장애인일 뿐이다. 카나에는 조제를 ‘엉덩이로 바닥을 쓸고 다니는 여자’라고 말하고, 츠네오의 동생도 그녀를 ‘장애인 여자’라고 부른다. 조제와 츠네오가 서로 마음을 확인한 후 이별을 통보받은 카나에는 조제를 찾아온다. “당신의 무기가 부러워.”라고 말하는 카나에는 조제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츠네오가 조제를 사랑(혹은 동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시선은 츠네오의 세계가 둘을 바라보는 시선과 다르지 않다. 조제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고, 장애인이기 때문에 둘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고 츠네오의 세계는 말한다.
하지만 츠네오에게 있어 조제는 매력적인 한 인간이다. 조제의 장애는 처음 그녀에게 흥미를 갖게 만든 한 가지 이유였지만 그는 이내 그녀의 다른 면들에 애정을 느낀다. 훌륭한 요리 솜씨, 그녀의 이상한 잡지식들, 양아치인 코지에 대한 다정함. 츠네오에게 있어 그녀의 장애는 그저 그녀의 한 가지 특징일 뿐이다. 둘은 서로의 세계가 충돌함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진다. 조제는 츠네오를 따라 새로운 것들을 배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잠자리가 좋다는 것도 알게 되고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호랑이도 마주 볼 수 있게 된다. 그녀는 그렇게 츠네오의 세계를 배우며 성장해간다.
1년의 시간이 지나고 조제와 츠네오는 츠네오의 시골집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이 여행에서 츠네오는 애써 외면했던 조제의 세계를 대면한다. 조제의 아이 같은 순수한 면, 자기 멋대로인 고집, 그녀의 무게. 휴게소에서 그는 시골집에 전화한다. 일이 있어 갈 수 없게 되었다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는 자신감을 잃는다. 사랑만 있으면, 둘만 있으면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는 두 세계의 충돌 앞에 결국 무릎 꿇는다. 조제는 사랑의 끝에 다다랐음을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둘은 바다로 떠난다. 오직 둘 뿐인 바다에서 그들은 행복하다. 조제는 바닷속처럼 반짝이는 모텔의 방에서 츠네오에게 말한다.
"언젠가 자기가 없어지게 되면 미아가 된 조개껍데기처럼
혼자서 바다 밑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되겠지.
하지만 그것도 괜찮아.”
조제는 이제 외로움을 알게 되었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어서 외롭지 않았던 깊은 바다 밑바닥에서 그녀는 헤엄쳐 올라왔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부딪히고 배웠다. 비록 사랑이 끝난다 해도 그녀의 세계는 한층 넓어졌다. 츠네오는 어땠을까? 그는 조제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였지만 자신은 조제의 세계로 스며들지 못했다. 그는 자꾸만 충돌하는 두 세계의 다름을 견뎌내지 못하고 도망친다. 츠네오는 자신의 세계를 상징하는 카나에에게로 돌아간다. 츠네오는 오열하고 조제는 담담했다.
사랑이 끝난 후 조제는 자신의 삶을 산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장을 보고 요리를 한다. 그녀의 세계를 상징하던 유모차에서 벗어나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사랑은 또 다른 세계와의 만남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이해하고 성장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그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을 그리는 영화가 아니다. 어차피 모든 사랑은 서로 다른 두 세계의 만남이 아닌가. 영화는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고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려는 그 과정을 담는다. 츠네오는 사랑의 과정에서 발가벗겨진 자기 자신을 마주했다. 그는 비록 조제를 떠났지만 스스로에 대해, 또 다른 세계에 대해 배웠을 것이다. 그들의 사랑에는 실패도 성공도 없다. 서로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모든 기억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조제와 츠네오에게는 그 사랑이 조금 아프게 성장해가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아마 또 다른 사랑을 하고 또 다른 세계를 만나면서 다른 모든 이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성장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