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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아리콩 Aug 10. 2022

빛의 난반사가 그려낸 색색의 플레어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



파란 페인트가 칠해진 어두운 사무실에 파란 남자가 앉아 있다. 그를 따라 바깥으로 나가면 빨간 문들이 이어진 건물이 보인다. 어둠에서 빛으로, 파랑에서 빨강으로 변해가는 일출 직전의 하늘을 배경으로 빨간색 차 한 대가 갑자기 와장창 고꾸라지며 날아간다. 뒤이어 달려온 빨간색 택시는 덩그러니 피아노(사실은 오르곤)을 두고 후다닥 떠나 버린다. 해가 뜨고 파란 남자는 환한 빛과 함께 찾아온 빨간 여자를 만난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러브 코미디 영화가 여기 있다. 펀치 드렁크 러브. 정신없고 시끄럽고 사이코 드라마 같기도 한 이 영화는 한 인간이 세상과 부딪히며 타인과 만나고 사랑하고 또 변해가는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감독은 전쟁 같은 이 사랑의 서바이벌을 사운드와 색감을 이용해 극대화시킨다. 관객은 오프닝 10분을 통해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을 제공받는다. 


파란 정장을 입은 남자 베리(아담 샌들러)의 세상은 온통 파랗다. 그의 옷도 그의 사무실도 그의 집에도 파란 TV 화면만 쓸쓸히 켜져 있다. 반면, 그의 공간을 벗어난 외부 세계는 온통 빨갛다. 문도 자동차도 환한 빛과 함께 찾아온 빨간 드레스의 레나(에밀리 왓슨)도. 그 외부 세계는 베리의 눈에 빨간 신호등이 켜진 것과 같다. 자동차가 갑자기 전복하거나 뜬금없이 오르곤이 버려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또 하나의 인상적인 부분은 색색깔로 번지는 렌즈 플레어다. 렌즈 플레어는 촬영 시 너무 밝은 빛이 카메라에 스며들어 화면에 여러 가지 색이 반사되는 현상을 말한다. 굳이 의도하지 않는 이상 일부러 만들지는 않는 현상이다. 그러나 감독은 애써 이러한 현상을 영화 구석구석 집어넣은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로 렌즈 플레어가 등장하는 장면은 베리와 레나의 첫 만남이다. 대화하는 둘의 사이에 무지개처럼 파랗고 빨간 띠가 비친다. 두 가지 개성을 지닌 두 가지 색의 충돌. 렌즈 플레어는 카메라의 오류이지만 때때로 이렇게 의도치 않던 아름다운 빛깔을 만들어 낸다. 


자신만의 색을 갖고 태어난 인간이 어떻게 다양한 색감의 외부 세계와 충돌하여 그 속에 어우러져 자신에게 맞는 또 다른 색을 찾아가는가. 감독은 이러한 색감들을 통해 삶의 색채학, 사랑의 색채학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10분의 오프닝 끝에 화려하게 번지는 색색의 그래픽은 그 색채학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전 가끔 제 자신이 싫어요. 도와주시겠어요?"

"그래서 정확히 뭐가 문제냐고?”



베리의 삶은 스트레스로 가득 차있다. 일곱 명의 누이는 사사건건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어디에도 얘기할 곳이 없어 매형에게 고민을 털어놓지만 그는 베리의 비밀스러운 고민 상담을 누이들에게 떠벌린다.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것만큼 인생을 외롭게 만드는 일은 없다. 그것이 문제인지 조차 모르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베리는 울음을 터뜨린다. 모두가 빨강인 세상에서 나만 파랑인 상황. 고민을 들어주던 매형은 붉은색 셔츠를 입고 있다. 


섞일 수 없는 세상에서 그는 대화할 사람을 돈을 주고 사게 된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그는 짐작하지 못한다. 다음 날부터 매트리스 맨 무리의 협박이 시작된다.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우리의 호구 베리는 허둥지둥하는 와중에 레나를 다시 만난다. 그들의 두 번째 만남은 마치 전투 같다. 본격적으로 베리가 외부세계와 부딪히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레나는 베리의 공간으로 훅 들어오고 그에게 호감을 표시한다. 베리는 자신을 포장하거나 숨기기에 바쁘다. 배경으로 신경질적인 사운드가 깔리고 협박 전화는 오고 지게차는 사고가 나질 않나 여동생은 자꾸 듣기 싫은 소리를 해대고 정신이 없다. 두 사람의 만남은 두 개의 우주가 만나는 것과 같다. 마치 빅뱅 같은 것이다. 그 만남이 차분하고 조용할 리 만무하다.  


 영화 속에서 베리가 집착하는 몇 가지 소품이 있다. 그것은 푸딩과 피아노, 그리고 망치이다. 각각의 소품이 의미하는 바는 꽤 명확하다. 


 베리는 헬시초이스의 푸딩을 모은다. 그는 그것으로 비행기 마일리지를 모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에게 있어 푸딩 마일리지는 일확천금이고 꿈이며 미래다. 그는 푸딩의 비밀을 그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공유한다. 베리는 첫 데이트에서 레나에게 그 비밀을 말한다. 푸딩의 비밀은 일종의 테스트이자 소통의 시도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쉽게 자기 자신을 드러낸 것을 후회한다. 그녀가 그의 트라우마인 망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망치는 그에게 있어 고통스러운 과거의 분노다. 우리의 호구 베리는 언제나 정작 분노를 표출해야 할 대상에게 분노하지 못한다. 분노를 당연시하지 못하고 스스로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기분에 자신을 억압하고 억압하다가 애꿎은 창문이나 화장실 따위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 모든 기억들이 트라우마로 남아 베리의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그는 내내 자격지심과 지질함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 초반부, 베리는 버려진 피아노를 줍는다. 사람들이 오르곤이라고 알려주지만 그는 피아노라고 부른다. 오르곤은 빨간 세상에서 상처받고 버려진 베리 자신과 같이 느껴진다. 그는 오르곤의 고장 난 부분에 반창고를 붙이듯 테이프를 붙이고 소중히 여긴다. 그는 때때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오르곤을 눌러보는데, 이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베리의 욕망이 아닌가 한다. 


파란 야밤의 조명 아래 자동차에서 데이트를 한 두 사람. 레나는 베리의 세상으로 한 발짝 들어온다. 베리는 데이트의 끝까지 지질했지만 레나의 용기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키스를 한다. 이제 행복을 찾아야 할 베리에게 또다시 불행이 휘몰아친다. 베리는 매트리스맨 무리에게 돈을 뜯기고 얻어맞는다. 우리 모두의 호구가 된 베리는 자신의 이런 지질한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회사 직원에게 하와이에 간다고 말하며 푸딩을 사는 베리의 뒤로 또다시 신경질적인 사운드가 깔린다. 이 사운드는 그가 다른 세계와 부딪힐 때, 그가 다른 세계로 도망치려 할 때마다 등장한다. 푸딩 마일리지가 좌절되고 그 모든 고난을 지나 결국 하와이행을 택하면서 달콤하고 부드러운 음악이 시작된다. 그의 도전, 다른 세계로의 이적이 안정권으로 들어선 것이다. 빛나는 항공 통로의 끝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행복하다. 


레나는 빨간 여자이지만 빛이기도 하다. 하와이에 도착한 베리는 레나의 연락처를 얻기 위해 동생에게 전화를 한다. 이때 처음으로 그를 화나게 하는 당사자에게 분노를 표출하면서 베리는 한 단계 성숙한다. 레나의 연락처를 얻어 겨우겨우 연결이 된 순간, 정신없는 페스티벌의 가운데서 불이 반짝 켜진다. 모든 색의 빛을 섞으면 하얀빛이 된다. 레나는 베리의 파랑까지도 품어줄 수 있는 하얀빛이 아닐까. 하와이에서 만난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색이 빛나는 바닷가를 배경으로 하나 되어 어우러진다. 마침내 베리는 레나를 통해 외부 세계로 섞여 들기 시작한다.  


또다시 불행이 휘몰아친다. 베리와 레나는 매트리스맨 일당에게 교통사고를 당한다. 하지만 베리는 더 이상 예전의 베리가 아니다. 그는 레나의 용기로 세상 속으로 끄집어내 졌고 정당한 곳에 정당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창문이나 깨부수던 베리는 그 분노를 모아 매트리스맨 일당을 후드려 팬다.



"내가 얼마나 강한 힘을 지녔는지 넌 모를 거야. 

나에게는 사랑이 있어. 

사랑은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날 강하게 하지."



매트리스맨에게 전면전을 선포한 베리는 그를 찾아 유타까지 간다. 그는 더 이상 도망치거나 숨지 않는다. 매트리스맨을 코 앞에 마주하고도 그는 당당하다. 사랑에 빠졌기에 상상 못 할 만큼 강하다는 베니에게 닥쳐를 연발 하던 매트리스맨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우리가 당당하게 자신의 모습으로 세상 앞에 설 때, 거대해 보이는 세상도 사실은 별것 아닌 것이다. 


베리는 오르곤을 들고서 EXIT가 수없이 적힌 복도를 지나 레나의 집에 이른다. 피아노인 척하는 베리가 피아노인 척하는 오르곤을 놓고서 사실 자신은 오르곤임을 아니, 쪽팔리고 지질한 사람임을 고백한다. 누구보다 진실되지 못했고 거짓으로 자신을 보호해야만 했던 베리. 마침내 그는 자신의 진실된 모습까지도 사랑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난 것이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대사를 남긴다. 



"8주만 있으면 푸딩 마일리지가 나와요. 

그때까지 당신이 기다려만 준다면 당신 가는 어디든 나도 갈 수 있어요.



베리에게 있어 꿈이자 희망, 미래이기도 한 푸딩 마일리지를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쓰겠다는 것. 베리가 지금까지 보여준 푸딩에의 집착을 떠올려보면 레나를 향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포옹 위로 또다시 파란 렌즈 플레어가 비친다. 베리의 파란 렌즈 플레어는 레나의 빨강 드레스에 멋지게 어우러진다. 


더 이상 다른 누군가 인 척하지 않는 베리는 더 이상 피아노인 척하지 않는 오르곤을 연주한다. 그렇게 파란 남자는 빨간 여자와 함께 한다. 


교훈 : 개인 정보를 함부로 알려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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