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닥임'의 제스처는 접촉 불가능한 것에 닿기 위한 소망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 토닥임의 의미는 접촉과 비접촉 사이의 리듬과 강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같다.
'토닥임'은 여러 제스처로 나뉜다. 첫째는 피부와의 접촉되는 시간이 짧고 접촉의 강도에 세심함이 담긴 토닥임이다. 여기서 '접촉 불가능한 것'은 '타인의 고통'이고 제스처의 머뭇거림으로 인한 세심한 리듬은 그 고통 앞에서의 나의 무력함, 부끄러움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에 답하고자 함이다.
발자크 Honoré de Balzac는 《La pudeur est un doute peut-être. 부끄러움은 아마도 의심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의심'은 고통에 대하여 응답하는 손의 제스처에 대한 조심스러움, 머뭇거림일 것이고 이 다정한 무력함을 지칭하는 감정이 부끄러움일 것이다.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는 발자크의 말을 뒷 받침하는 것 같다.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윤동주의 시는 시대의 고통에 대한 조심스러운 토닥임과 같다. '쉽게 쓰여짐'의 의미는 고통의 헤아릴 수 없는 무게 앞에서 쓰는 행위의 본질적 가벼움에 대한 부끄러움일 것이다. 그럼에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이 고통에 대한 응답이 '시인의 슬픈 천명'이기 때문이다.
'토닥임'의 두 번째 제스처는 접촉의 시간이 좀 더 길지만 그 강도는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섬세함이 있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가 잠이 들게 하기 위하여 하는 토닥임과 같다. 이 제스처에서 세심하게 놓인 손은 또 다른 심장의 두근 거림과 같다. 이 리듬에 맞추어 아이의 심장은 점점 손의 느린 리듬에 맞추어지고 잠에 든다. 따라서 토닥임은 언제나 '천천히 토닥임'이다.
이 점에서 토닥임은 '두드림'과 구분된다. 두드림은 우리에게 쉼을 주는 토닥임과 달리 '잠에서 깨운다'. 두드림은 타자에게 '내가 여기 있음'을 알리고 응답을 요구하는 행위인 반면 토닥임은 '함께 있음'을 조용히 느끼게 하는 행위이다.
또한 토닥임이 아니지만 '토닥임을 가장한 만짐'이 있다. 느린 리듬은 토닥임과 닮았지만 접촉의 강도는 손의 욕망을 드러낸다. 이 강도를 뜻하는 단어 'intensity'는 손과 피부의 관계를 지시한다(intensity는 '긴장(tension)' 안 (-in)에 있는 것이다). 토닥임을 가장하는 손의 힘은 피부를 향한다. 손의 힘의 기능적 본질은 essence는 '잡는 것', 소유하는 것이다. 이 소유의 폭력성을 숨기는 것이 느린 리듬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힘의 긴장의 강도에 있어서는 비슷하지만 힘의 방향이 '손에서 피부'로 향하는 것이 아닌 '피부에서 손'으로 향할 때이다. 토닥임의 또 다른 의미인 '붙듦'이다. (억류의 의미가 아닌) 붙든다는 것은 무게를 대신 짊어지는 것이다. 토닥임 가운데 미세하게 들어간 힘은 고통의 무게를 대신(혹은 함께) 짊어지고자 하는 요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