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이름이 없다.
한 없이 가깝고 그래서 나의 살갗을 파고드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을 멀리 떠나보내기 위해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법을 사람들이 배웠나 보다.
오래전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에서 고통에 무뎌지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더 이상 얼굴을 붉히거나, 떨고 싶지 않았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이런 모욕적인 말들에 익숙해지고 싶었다.
우리는 부엌 식탁 앞에 마주 앉아서 서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런 말들을 되는 대로 지껄여댔다. 점점 심한 말을.
하나가 말한다.
"더러운 놈! 똥구멍 같은 놈!"
다른 하나가 말한다.
"얼간이! 추잡한 놈!"
우리는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게 될 때까지 계속했다.
우리는 매일 30분씩 이런 식으로 연습을 하고 나서, 거리로 바람을 쐬러 나간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욕을 하도록 행동하고는, 우리가 정말 끄떡없는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옛날에 듣던 말들이 생각났다.
엄마는 우리에게 말했다.
"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내 행복! 금쪽같은 내 새끼들!"
우리는 이런 말들을 떠올릴 적마다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런 말들은 잊어야 한다. 이제 아무도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추억은 우리가 간직하기에는 너무 힘겨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습을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작했다.
우리는 말했다.
"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난 너희를 사랑해······난 영원히 너희를 떠나지 않을 거야······난 너희만 사랑할 거야······영원히······너희는 내 인생의 전부야······."
반복하다 보니, 이런 말들도 차츰 그 의미를 잃고 그 말들이 주던 고통도 줄어들었다.»
전쟁 이후 고약한 할머니에게 맡겨진 두 아이는 고통에 무뎌지는 훈련을 한다. 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상처 입는 말들에 무뎌지는 훈련을. 말은 감각을 일으키는 힘이 있어서 날이 선 말은 우리를 상처 입힌다. 그러나 또한 말은 그 감각을 말뿐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말의 의미 없는 반복은 말로부터 일어나는 감각을 소진시키는 데 적합하다.
날카로운 말들, 살을 베는 것 같은 말들은 그 자체로 아프다. 그러나 그보다도 내가 소망할 수 없는 온기가 더욱 아프다. 날카로운 말은 살의 부분을 나누지만 바랄 수 없는 따뜻함이 주는 아픔은 살 전체를 태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더 그러한 온기에는 이름이 붙어야 한다. 그리고 그 온기가 이름에 스며들어 작은 불꽃을 만들고 모두 태우기 전에 새롭게 외쳐야 한다. 그러면 그 온기는 사라지고 이름만 남는다. 그러면 아프지 않다.
이 온기는 다른 말로 하면 삶 그 자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혼자서 이름 없는 삶들에 대하여 쓰고 말한다. 나의 이 말들이 나를 그 온기로 데려다 주기를 소망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말들이 반복해서 외칠 수 있는 이름이 되어 그 온기가 주는 고통에서 떠나기를 갈망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