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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각 Dec 18. 2024

아기 덕분에 행복하지만 나로서 있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집 안에 만들어놓은 테라스캠핑장, 좋아하는 것을 모아놓은 공간

  엄마가 된지 78일째, 두 달 반만에 글을 쓰려고 하면서 글감을 골랐다. 요즈음의 내 일상은 아기를 낳아 세달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내본 시간이다. 아기의 울음소리에 천근만근인 몸을 일으켜 기저귀를 갈고 보채는 아기를 어르며 수유를 한다. 입 짧은 아기와 매일 실랑이 하며 너무도 어려운 모유수유를 지속한다. 어떤 시간엔 잘 먹고, 어떤 시간엔 못 먹고, 어느 때엔 많이 토하고 어느 때엔 무탈히 지나가는, 3시간마다 같은듯 다르게 반복되는 아기 먹이는 시간. 잠을 잘 자지 못해 내내 보채며 잠투정하는 아기를 안고 손목이며 어깨며 아파하는 날들. 그리고 또, 반복되는 힘든 시간들 속에서도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아기의 귀여운 모습에 행복감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생경하다. 결혼하고 5년 동안 아기를 낳을 생각은 하지 않았던 우리 부부가 캐나다에서 2년 살며 언제나 어린 아이들과 큰 개와 뛰노는 가족의 모습을 보며 아기 낳을 결심을 하고, 조산기로 두달 넘게 입원 생활을 하다 어렵게 만난 우리 아가. 울며 보내던 병실에서의 9주의 괴로움이 금새 잊혀질만큼 아기가 예쁘게 느껴진다는게 신기하다.


  열흘 전부터 눈이 마주치면 방긋 웃는 아가 덕분에 코 끝이 찡하다. 티 없이 맑은 눈과 해사한 미소를 보고 있으면 한두시간도 이어 자지 못했던 두달 남짓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도 새벽에 두 번은 일어나 아기를 먹이고 어르고, 긴긴 낮에는 낮잠이 짧은 아가와 정신 없이 시간을 보내지만 그럼에도 아기와 함께한 두달 반이 살면서 경험한 어떤 일보다 순수한 행복으로 가득했다고 진심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게 낯설게 기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울었다. 예민한 기질을 가진 아가를 먹이고 재우는 일이 생각지도 못하게 어려웠다. 아프고 지친 몸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면서 기절하듯 모자란 잠을 보충해도 힘겨운 육아로 지친 마음이 충전되지는 않았다. 그럴 때는 잠을 포기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5분, 10분이라도 했다. 20년 동안 일기를 쓰고, 책을 읽을 때 마음이 정돈되었기에 그 시간이 필요했다. 좋아하는 분위기의 공간에서 읽고 쓰고 싶기에 아기 용품으로 가득찬 집 안에 단절된 공간이 필요했다.


  캐나다에서 귀국해 집 정리도 하지 못하고 장기 입원을 하다 아기를 낳아서 방치되어 있던 테라스 공간을 꾸몄다. 아기가 자는 동안 10분, 20분씩. 조금씩 채워갔다. 캐나다에서 캠핑족이 되어 2년을 살다 돌아오니 그 시간이 그리워 캠핑장 분위기를 만들었다. 캠핑의자와 롤테이블을 놓고, 양초가 일렁이는 듯한 조명을 뒀다. 벽에는 가장 좋아하는, 와인을 마시고 책을 읽는 그림이 그려진 패브릭 포스터를 걸고, 지난 2년 동안 여행지에서 모아온 그림과 사진, 패브릭 포스터를 붙였다. 매번 텐트에 걸었던 전구를 생각하며 알전구를 달고 언제나 캠핑 의자에 달아 놓았던 스피커를 가져다 놓았다. 세계지도에 여행지에서 모은 핀을 달았다.  레이크 루이스의 카약.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의 은하수 헤는 밤, 오로라로 일렁이는 하늘, 가을 단풍으로 아름답던 알곤퀸. 7월부터 반년 동안 병원과 집 안에서만 지내고 있는 내게 마치 전생 같이 느껴지는 캐나다에서의 2년이 사진과 그림으로 남아 공간을 채웠다.  



  잠을 포기하고 공간을 꾸미면서 웃음이 났다. 캠핑하며 매일 듣던 anthony lazaro의 life could be so simple을 틀어 놓으니 해먹에 누워 햇빛이 일렁이는 나무를 오래오래 바라보던 시간이 생생했다. 사랑스러운 내 아가를 안고 있는 시간도 행복하지만 사실 신생아를 돌보면서 웃음이 실실 나지는 않던데, 좋아하는 것으로 공간을 매만지고 있으니 웃음이 실실 났다. 이 기분은 아가를 안고 있을 때의 순수한 행복감과는 다르다. 그래, 이 감정은 즐거움이다. 나는 즐겁게 공간을 꾸미고는 자주 그 곳에 앉아있었다. 두 시간 넘게 울고 불고하는 아기를 얼러 겨우 재운 후 지친 몸으로, 커피 한잔을 챙겨 멍때리며 음악을 들었다. 처음엔 기운이 없어 두 세곡의 음악을 들으며 멍하니 커피 한잔을 마셨다. 그러면 엄마인 내가 잊혀졌다. 짧은 시간 쉬고는 쌓인 집안일을 하고 부족한 잠을 잤지만 10분 남짓의 그 시간이 달았다. 아기가 점점 크면서 길게 낮잠 자는 시간이 생겼을 땐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고 일기를 썼다. 잉크를 채우는 시간도 사치였는데 만년필로 일기를 쓰는 건 내 오랜 습관이니 사치스럽게 시간을 썼다. 물론 일기장에 쓰는 내용은 온통 내 아가의 이야기이지만. 좋아하는 색의 잉크를 채워 사각 사각 글을 쓰고 있으니 또 다시 엄마인 내가 잊혀졌다.  

  어느 저녁에는 요리를 좋아하는 남편이 화이트와인을 넣고 홍가리비찜을 만들었다. 두 시간씩 걸리는 요리를 좋아하는 남편이지만 쉽고 간단한 메뉴를 골랐다. 비록 아기가 10분마다 깨어 우는 바람에 2시간이 더 지나 9시가 넘어 식은 가리비찜을 데워 늦은 저녁을 먹어야 했지만 즐겁고 또 즐거웠다. 그와 함께한 5년 동안 늘 즐기던 와인과 맥주 대신 무알콜 맥주를 마시면서도 엄마 아빠인 우리가 잊혀지고 신혼처럼 즐거웠다.

  

  이제는 책도 읽는다. 날이 추워져 캐나다에서 캠핑할 때마다 입던 패딩을 입고, 텐트 안에서 안고 자던 보온 물주머니를 안고 무릎담요를 덮고. 아기 용품으로 가득찬 방과 거실을 떠나 좋아하는 것으로 채워진 테라스에 앉아 불편함을 감수하고 나로서 있는다. 그렇게만 채워지는 어떤 힘을 충전하고는 다시 내 아가의 옆으로 돌아온다. 집안일을 하고 아가를 돌보고 쪽잠을 잔다.


  그렇게 충전된 마음으로 생각한다. 행복하다고. 지난 날 부지런히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누려온 덕분에, 아름다운 경험을 잔뜩 해둔 덕분에, 반복되고 지치는 일상에서 나를 빠르게 회복시킬 수 있어 감사하다. 그렇게 충전된 마음을 오롯이 내 아기에게 쓴다. 만난지 세달이 채 되지 않은,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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