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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사 Feb 08. 2023

더글로리를 보다 떠오른 어린 나

어린 시절의 나에게

더 글로리가 요즘 핫하다. 학교폭력이 주제라 보기가 조금 힘들지만 그래도 남편과 한편씩 보고 있다. 너무 수위가 높은 폭력들이 나오는데 실제 사건들이 모티브가 되었다니 충격적일 뿐이다. 학교폭력은 아니지만 나는 학창 시절 늘 따돌림받는 아이였다. 그래서 그럴까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단짝이 없는 아이들이 있다. 얼핏 보면 조용해서 알아서 잘 지내는 줄 알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또래집단에서 겉도는 아이들. 나는 그런 아이였다. 소풍 갈 때 짝꿍이 없는 아이. 연말에 반에서 모두에게 나누어주는 상에 '착한 아이 장려상' 따위를 받는 무색무취에 누구에게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아이. 


관계 맺는 것이 어려운 나에게 첫 번째 도피처는 책이었다. 책을 읽는 시간에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어른들은 기특하다고 생각하셨다. 동생이 없으면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어색했다. 모든 수행평가는 엄마와 함께 했다. 초등학교 시절까지는 '그저 조금 내성적인 아이' 정도로 인식됐던 것 같다. 간혹 내가 눈에 띄게 되는 순간들은 짓궂은 남자아이들의 장난에 과도하게 예민하게 굴며 울어 일을 키울 때 정도였다. 나의 6학년 시절 담임 선생님은 그런 나에게 '남자아이들이 놀릴 때마다 일일이 우는 네가 더 이상하다. 아이들이 놀리는 것을 보면 문제는 너에게 있는 거 아니니'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아직도 그 장면이 생각나는 것을 보면 꽤 충격적인 순간이었나 보다. 


초등학교 때 인상적인 일은 모두 부정적인 사건인데, 한 번은 방학이 생일인 나에게 어떤 요샛말로 인싸인 친구가 무조건 생일파티를 하라며 부추겼다. 친구들과 어색했지만 잘 지내고 싶었던 나라 생일파티를 엄마에게 허락받았다. 내심 딸 생일파티를 잘해주시고 싶었던 엄마는 김밥도 잔뜩 피자도 시키고 잡채도 하고 심지어 이웃 아주머니와 함께 케이크도 직접 구워서 너무너무 멋진 생일 상을 차려주셨다. 그리고 그날 내 생일 파티의 참석자는 내 동생과 이웃의 동생 친구뿐이었다. 그때 내가 울었는지 어땠는지는 생각이 안 난다. 그저 그날 다른 친구도 생일 파티를 해서 수많은 친구들이 갔고 나도 오전에 갔었던 기억만 희미하다.  


조금 더 고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조별활동이 유행이라 조별로 함께 앉아야 했는데 예쁘게 생긴 친구가 나를 포함한 조원들에게 공휴일에 함께 놀이공원을 가자고 한 것이다. 초등학생끼리 가기엔 돈이 좀 들지만 아무렇지 않게 친구가 자긴 가봤다는 말에 오케이 했다. 그리고 다음날 만나기로 한 버스정류장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은근히 따돌림을 받고 있는 나를 놀리기 위해 나머지 조원들끼리 말을 맞추고 장난을 친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바보 같이 제자리에서 계속 기다리기만 했는데 그런 나를 알았는지 아빠와 동생이 와서 함께 수목원에 갔다. 울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냥 많이 실망했을 뿐.




머리가 굵어질 중학교 때도 나는 초등학교 때랑 별 차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친한 친구가 생겼다. (지금도 베스트 프렌드로 지내는 친구가 중학교 친구다.) 문제는 그 친구들과 반이 갈리고 고등학교가 갈렸다는 것이다. 내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면학분위기가 강해서 0교시부터 특별 야간자율학습(일반 야간자율학습보다 시간이 길다)까지 하루에 15시간은 가뿐히 학교에서 생활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부터 친구들과 잘 지내지 못했는데, 일부 내 지질했던 과거를 아는 동창들이 은근히 나를 무시했고, 당시에 친구가 없어 공부만 했던 나에 대한 질투도 조금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제일 중요했던 것은 의욕적으로 가입한 동아리에서였다. 내가 가입한 곳은 악기 합주를 하는 동아리였는데, 초보자도 환영이었다. 신입생 환영회 때 악기소리에 완전히 반한 나는 동아리에 혼자 가입했는데 이것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나는 동아리에서 무척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자발적으로 연습을 하고 동아리원들에게 합주하자고 먼저 다가갔다. 그런 내 모습을 선배들은 좋게 보았는데 오히려 동기들은 자꾸 주목받고 나대는 나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정작 나는 이런 공기를 악기의 즐거움 때문에 잘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2학년이 되었을 때 본격적인 왕따가 시작됐다. 나는 선배언니들의 몰표로(나는 예상하지 못했으나 동기들은 언니들에게 알랑방구를 뀌었다고 오해했다.) 동아리 회장이 되었으나, 동기들의 지지는 받지 못했다. 동기들은 대다수가 한 반 출신이었는데 거기서 A라는 친구를 리더로 밀고 있었다.(나는 그것도 몰랐다. 눈치도 없지) 여하튼 그 친구는 부회장이 되었고 동아리는 회장인 나와 부회장인 친구파로 나뉘었다. (하지만 고3이 은퇴한 시점에서 내 편은 없다고 봐야 했다.) 신입생 환영회 연습날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뒤늦게 한 친구가 이런 사실들(동기들이 나를 고깝지 않게 봤다는, 그래서 복수? 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알려주어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한 해동안 나의 마음은 부서지고 짓밟혔다. 후배들 앞에서 대놓고 면박을 주거나 연습에 무단으로 빠지고 심지어 나의 반에 와서 멱살을 잡고 '네가 뭔데 맘대로 하냐'는 이야기도 했다. 그전까지 나는 꽤 공부를 잘했던 학생이었지만 2학년 때 왕따를 당하면서 자퇴를 생각하며 매일 학교에서 자는 애로 바뀌었다. 엄마의 노력과 사랑으로 간신히 졸업은 했지만 대학에는 떨어져 재수를 했다. 다행이도 재수생활을 같이한 친구들이 다정했고 나의 과거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다시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었다. 




나는 왜 친구들과 잘 지내지 못할까라는 자책과 외로움과 괴로움은 나를 계속 따라다닌다. 언젠가 그 동아리 동기의 이름을 페이스북에 검색해 본 일이 있다. 공무원이 되어 잘 살고 있더라. 페이스북을 삭제했다. 그 누구의 탓도 하고 싶지 않아서. 특히나 내 탓은 더더욱 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잊히지 않는 것을 보면 쉽지 않을 것 같다. 나의 우울이 어디서 오는가, 나는 나의 과거에서 온다고 말한다. 그래서 복수만을 위해 살아온 동은이를 보는 게 아픈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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