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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쥬디 Jul 20. 2024

허균과 허초희(난설헌)

 사회에 굴하지 않았던

파직 소식을 듣고


 내 오랫동안 불경(佛經)을 읽어온 것은


내 마음 머물 곳이 없었음일 레라.


(중략)


 내 분수 벼슬과는 벌써 멀어졌으니


파면장이 왔다고 내 어찌 근심을 하랴.


 인생은 또한 천명(天命)에 사는 것.


돌아가 부처 섬길 꿈이나 꾸리라.


(중략)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이나 써라.


나는 내 일생 나대로 살리라.


 친한 벗들은 찾아와 위로를 하는데 


처자식들은 내심 불평이구나

(후략)

허균


화광신문에 교산 허균의 시와 이야기가 나와 흥미를 끌었다. 국어책에 나온 대로 단순히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쓴 작가이고 그의 여동생 허초희 (난설헌)이 시를 잘 지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한 책을 찾아보고 검색을 해보니 사연이 많은 문인들이었다. 허균은 조선 중기 경상도 관찰사였던 허엽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난설헌은 허균의 누이다. 후처의 자녀들로 태어났지만 남매 함께 당대 최고의 문인이고 학자인 이달에게서 한시를 배웠다. 나중에 벼슬을 하면서 술만 한잔 하면 허균의 한시가 줄줄 나와 재능이 뛰어나다고 친구들이 부러워했지만 사실은 15년 가까이 한시를 매일 읽고 써보고 배워서 그렇게 된 것이라 한다. 재능은 노력이 쌓여야 결과를 볼 수 있다. 아버지 허엽은 유교 사상에만 치우쳐 있지 않았고, 비교적 자유분방한 사람으로 자연스레 자녀들에게도 유, 불, 선, 도교 사상, 우주의 원리를 가르치고 자유로운 영혼을 찬양하고 약자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인간이 차별 없이 존중되는 정의로운 사회를 가르치는 학자 이달을 스승으로 삼아 가르치게 했다. 이달은 서자 출신으로 재능이 뛰어났어도 관직에 나갈 수 없었고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적자, 서자의 차별 철폐를 주장한 것은 스승의 영향이라고 한다. 자유분방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던 난설헌은 15살에 긴 성립과 결혼하는데 유교사상으로 꽉 막힌 시댁에서 그녀는 남편과도 시부모 하고도 어울리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했다. 결국 남매를 낳았지만 일찍 죽고 말았고 또 한 아이는 유산이 되어 그녀는 꽃다운 나이 27살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간에 지은 시를 허균이 모아 시집을 만들어 명나라에 가져가 문호인 주지 번에게 보이니 읽고 놀라며, 아름다운 자연과 제약 없이 자유롭게 시공마저 초월한 신선 세계를 노래한 87편의 ‘유선사’ 시집이 나와서 일본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그녀는 양간비금도, 작약도 등 그림에도 정평이 나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보면 중국에 가서 문인들과 필담을 나눌 때 그들이 허난설헌을 익히 알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 숭유억불정책을 쓰는 조선이 되면서 여성들의 삶은 더 핍박받고 천대받는 사회가 되어 당당히 드러내놓고 시를 짓거나 그림 그리는 일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런 재능을 타고나 창작하는 것을 원했던 난설헌에게는 시대적 제약에 숨이 막혔을 것이다. 게다가 아이들마저 일찍 가버렸으니 그 마음은 오죽했으랴. 시대의 제약을 벗어나는 길은 신선 세계를 초월한 시를 짓는 것뿐이었다. 그녀의 삶이 구슬프게 다가온다. 


 허균이 ‘파직 소식을 듣고’라는 시를 쓴 것은 1606년 삼척 부사에 부임했을 때 불상을 모시고 불교를 연구하며 사명대사, 서산대사 등과 친교를 가진 것에 대해, 억불숭유에 어긋난다고 파직 통고를 받은 후이다. 허균은 불교뿐 아니라 천주교 서적과 서양 문물 과학 서적도 중국에서 들여와 읽었던 인문, 자연과학의 대가였고 스님뿐 아니라 서자들, 기생들과도 폭넓게 교류하다가 계속 파직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호쾌하게도 

"나를 파직한다고? 너희들은 너희 법대로 살아라. 나는 나대로 살아가리라"


 라고 외치고 있다. 허균은 자신을 속박하는 사회에 당당히 맞섰다. 


허균은 홍길동전에서 율도국을 차지해 자신이 왕이 되어 다스리며 정의로운 사회로 태평성대를 이루는 꿈을 꾸었다. 현실에서는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출 논의에 앞장선 것을 이유로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해 생애를 마감한다. 현실의 벽은 높았다. 그는 여러 번의 과거 장원급제로 최고 관직에 여섯 번이나 오른 관료이자 명나라 사신으로 세 번을 간 외교관이었다. 서양으로 따지자면 괴테와 비견하기도 한다. 김탁환 소설가의 ‘허균, 최후의 19일’을 보면 당파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사람을 죽이고 그 가족이나 친족까지 처참하게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안타까운 마음에 창문 밖 장마철 비구름이 더 무거워 보인다. 


지나치게 자유분방해서 여러 비난도 들었던 풍운아 허균이지만 사람을 판단할 때 어떤 도덕적인 면만으로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하는 건 잔인한 기준이다. 어느 누구도 완벽한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이룬 사상이나 업적에 더 관심을 갖고 배우고 통찰하는 것이 훨씬 가치적이다. 시대적 제약 속에 비굴하게 엎드리지 않고 살아간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의 거침없는 자유로운 사상은 자유가 주어졌는데도, 어쩌면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옥죄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허균 #허난설헌 #홍길동전


#유불선도교 #이달 #적자서자차별철폐 


#유선사 #선철학 #삼척부사 #사명대사 #서산대사 


#숭유억불 #파직 #화광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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