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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신감 Oct 26. 2023

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덕

살림남의 방콕 일기 (#184)


도이퉁 빌라로 향하는 나지막한 언덕이 있다. 이 길은 단연코 치앙라이에서 가장 기분 좋은 산책길이 중 하나이다. 지독스레 뜨거운 무자비한 햇살아래 걸어 다니는 자체가 힘든 태국이지만 도이퉁 빌라 진입로는 애니메이션 속의 몽환적이고 자비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우거진 정글숲이 산책로의 그늘을 만들고 우측에는 형형색색 들꽃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계곡 아래에서 불어오는 나름 선선한 바람은 이마의 땀을 노란 손수건 마냥 스치듯 훔쳐 간다. 익숙한 저음의 매미소리, 고음의 풀벌레 소리가 합주를 이루고 숨이 절정에 오를 때 비로소 지중해 작은 섬의 바다색처럼 깊고 푸르른 하늘을 마주할 수 있다.


도이퉁 빌라는 스리나카린드라 황태후가 거주했던 왕실별장으로 생전 그녀의 성품처럼 소박하고 수수하다. 지금은 사시사철 피고 지는 꽃을 심어 예쁜 정원이지만 불과 수십 년 전까지 갈 곳 없는 소수 민족들이 아편을 재배하는 양귀비 밭이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 황태후의 심정이 여전히 이곳에 머물고 있는 듯 조용한 치앙라이지만 이곳은 한없이 평화롭다.  


이 아름다운 언덕을 칠순의 모친과 이모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에 높은 도이퉁 산 중턱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 구불하고 가파른 산길을 1시간여 달려왔을까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하면 나아질 거라 생각하고 도이퉁 빌라 매표소에 들러 표를 구매한다. 외국인에게 입장료가 비싼 태국 답게 도이퉁 빌라와 정원 2곳의 입장료가 180밧(7,000원)이지만, 만 60세 이상의 입장객에게는 여권확인 후 50% 할인을 해준다는 말에 내심 기뻤다. 하지만 노약자 할인이라는 말이 과연 기분 좋게 여행 온 당사자들에게 딱히 유쾌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모른 채 정가대로 표를 구매한다.


도이퉁빌라로 향하는 길 나지막한 100m 정도의 중간지점에서 어머니가 털썩 주저앉는다. 태국 여행을 위해 몇 달간 체력을 유지해 오셨다고 자신만만하셨던 터라 적지 않게 당황스럽다. 조금 앉아 쉬면 괜찮아 질거라 가볍게 생각하고 몇 분이 흘렀을까. 중력을 버티지 못하고 비스듬한 지면을 침대 삼아 몸을 기울인다.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강한 햇살이 얼굴을 비추니 상황은 더 좋지 않다. 언제 어머니를 엎어 보았을까. 생각보다 가벼워 더 당황스럽다. 도이퉁 빌라 입구 벤치에 어머니를 누이니 먼저 구경하고 오라는 말씀이 서럽다.


아름다운 도이퉁빌라를 앞에 두고 입장하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 아쉽지만 당사자의 마음은 오죽하리라. 대충 보는 둥 마는 둥 제집처럼 들고 나오니 여전히 현기증에 몸을 가누지 못한다. 치앙라이 여행 첫날 아침식사로 먹은 카오소이가 탈이 난 모양이다. 구토증세가 있어 화장실을 찾았지만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야 한다는 직원의 단호함에 앞이 막막하다. 별장안으로는 차량진입도 불가하고 비탈 내리막에 휠체어도 불안하다. 냉정해 보이는 관리직원들도 모친의 상태를 보니 이심전심이다.


왕의 별장 앞에서 구토를 할 수 없는 터라 직원들도 고심 끝에 빌라의 화장실로 긴급하게 안내해 준다. 태국은 왕국으로 왕실의 권한이 막강하다. 그것을 알기에 엄격한 왕실의 시설을 함부로 이용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선뜻 폐쇄된 화장실을 열어주었을 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한없이 베푸는 태국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 차량진입이 되지 않는 별장안이지만 전기카트를 몰고 와 안전하게 매표소 앞까지 바래다주고 함께 온 택시기사에게 전화로 미리 연락해 병원으로 긴급히 후송될 수 있도록 도움을 베풀어 주었다. 구불한 산길을 빠르고 편안하게 운전하는 택시기사의 노력이 더해져 모친의 응급처치는 잘 마무리될 수 있었다.


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덕이 어디일까? 단연코 도이퉁 빌라의 언덕길이다. 스리나카린드라 왕태후의 소수민족을 위한 하나의 이야기 만으로 충분히 아름답지만 한 명의 아픈 이방인에게도 한없이 베풀어 주는 치앙라이의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받았을 때 그 고마움은 어떤 감사함으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아마도 아름다운 도이퉁 빌라의 언덕은 다시 방문하게 될 것이며 그때의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우리가 잊어버린 이웃의 위로가 있는 곳, 베푸는 만큼 그 이상 돌려 받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치앙라이는 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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