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를 움직이는 두 축, 즉 수요와 공급을 이야기 할 때면 빠지지 않는 문구 하나가 있다. 애덤 스미스의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다. 경제학을 공부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이 문구는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영화나 심지어 코메디 프로그램에서도 툭하면 인용이 되니 말이다.
사실 이 문구는 <국부론>이라는 책에서 단 한 번 밖에는 등장하질 않는다. 그런데 고전 경제학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제에 관한 모든 이론을 이 한 단어가 함축해 준다.
즉슨, 가격의 결정에 관한거다. 나는 지금 내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돈까스를 대략 9,000원 정도에 팔고 있다. 누가 강요하거나 법으로 강제해놓지도 않았는데, 가격이 9,000원 인거다. 이게 적절한가? 모를 일이다. 그건 시장 참여자, 즉 소비자들이 생각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 가격은 도대체 어떻게 정해진 걸까. 애덤 스미스의 궁금증은 거기에서부터 시작이 됐다. 사람들이 돈까스를 먹으려는 욕구(수요), 그리고 나를 비롯한 지역의 돈까스 가게 숫자와 맛, 분위기 등(공급)이 한 데 어우러져 가격은 자연스럽게 형성이 된다. 만약 돈까스를 원하는 사람들은 넘쳐나는데, 돈까스 가게는 지역에 나 밖에 없다? 나는 그럼 가격을 9,000원에서 20,000원 가까이 올릴 것이다. 그래도 된다. 경제학의 원리다. 그 원리를 움직이는 무언가를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독점과 과점이 생긴다는 데에 있다. 가게 주인 한 사람의 배만 불려주는게 도덕적으로 타당한가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정부의 개입은 여기에서 시작이 된다. 작은 정부와 큰 정부, 얼마만큼 개입을 하는게 적당한지,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배달의 민족을 예로 들어보자. 그들은 초기에 독점이였다가 현재는 과점인 상태이다. 경쟁사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다보니 수수료를 제 멋대로 올린다. 1만원을 팔고 배민에 다 떼주고 나면 4,000원 정도가 남는 구조다. 거기서 월세와 인건비, 재료비, 공과금을 떼는게 현재 우리나라 자영업의 현주소인 셈인데, 얼마가 남을 것 같나? 그런데도 이들은 여전히 자영업자들과 상생 할 생각이 없다. 수수료를 오히려 더 올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럼 여기서 어떻게 하는게 바람직 할까.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그들은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할 뿐인데, 골고루 잘 살고 싶어하는 열망을 가진 민주주의 시민에게는 반하는 행동이다. 이 때 정부가 개입하는게 맞을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그 답을 우리는 현재까지도 찾고 있는지 모르겠다.
애덤 스미스는 말한다. 우리가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에 쏟는 관심, 즉 이기심 덕분이라며.
그의 말대로라면 배달의 민족 탓 만을 할 수 있을까? 아니라면 배달의 민족 경영진의 자비심을 기대할 수 밖에는 없는걸까?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 이전에 <도덕감정론>에서는 타인의 행복과 타인의 고통에 동감하는 인간의 천성을 강조했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에는 분명히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가 존재한다. 이 천성으로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라며.
오늘 배달의 민족 매출 정산을 꼼꼼히 살펴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보이지 않는 손에서 따뜻한 온기를 바라는 건 요원하다는 생각.
정부에서 포퓰리즘 식의 ‘보이는 손’을 내밀어 준다거나, 혹은 시장 지배자들의 감성에 호소한다거나, 하는 방법이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칼국수집 할머니의 자비로 혼자 넉넉한 낮술을 마시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