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연락처에 저장해놓은 지인들의 숫자가 얼만큼이나 될까. 걔중 휴대폰 번호를 머릿속에 외우고 있는 지인의 숫자는 또 얼마나 될까. 하물며 그 지인과 연락을 주고받는 횟수는 얼마일테며, 또... 그 너머에 관계를 도식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표식은 뭐가 있을까.
카톡 친구 숫자 3000명. 머릿속에 외우고 있는 폰번호 5명(가족들). 안부를 주고받는 지인 숫자 1명. 연락처를 통해 보는 지금 나의 관계도다.
이 테두리 안에서 경조사 때만 되면 폰이 울린다. 그리고 급전이 필요해 마지노선에 다다랐을 때도 폰이 울린다. 본인들이 기쁠 때는 남이 되고, 슬플 때는 끄나풀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또다시 친구 운운한다. 기쁨은 온전히 본인 가족들과 독점하고 싶은데, 슬픔은 가족 외에 혼자 있는 나 따위와 나누고 싶은 심술이 조금은 깃들어 있나보다.
여담이랍시고 이런 자조섞인 생각도 든다. 잊을만 하면 연락오는 지인들 얘기다. 술에 잔뜩취해 연락오는 전여친을 비롯해 선후배를 가리지 않는다. 이유를 생각해봤다. 이제와서 우리들이 연락할 이유가 1도 없는데 대체 왜 연락을 할까 싶은거다. 관계 속에 어떤 보험을 들어놓는걸까. 불꽃이 꺼지면 다시 점화하기 어려우니 살려는 두겠다는 의지 같은 것. 예컨데 10원짜리 동전을 대하는 자세다. 버리기는 아깝고, 갖고 있기엔 뭣하고. 모를 일이다. 예단은 되지만, 섣불리 속단은 하지 말아야겠다.
이제 SNS로 옮겨보자. 그놈의 ’좋아요‘를 누르면 소통이라 칭하며 친구로 인정을 해준다. 뜸하거나 게시물을 올렸는데도 ’좋아요‘나 ’댓글‘ 따위의 반응이 없으면 소통이 없다는 걸로 간주해 공개처형을 한다. 분기마다 한번씩 ’나에게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 사람들‘을 표적삼아 통과의례를 치르듯 친구 정리를 하겠다며 엄포를 놓는 분들도 제법 보인다. 그들에게 권해드리고 싶다. AI나 매크로 프로그램과 친구를 맺으시라고. 그 프로그램을 돌리면 아마도 ’좋아요‘ 숫자가 방탄소년단 만큼이나 부풀어 오를거라고. 그럼 그들의 바람대로 진정한 친구가 생겨나는 셈인거다.
굳이 마음에도 없이 우리 억지적으로 연락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행동 같은 것들을 하지 말자는 얘기다. 나는 AI나 매크로 같은 프로그램도 아니며 10원짜리 동전도 아니다. (이혼을 하는 바람에 무색하게 됐지만) 내 결혼식이나 우리 아버지 장례식에 와달라고 구걸하며 살아오지도 않았다. 앞으로도 더하면 더했지, 내가 생각한 삶의 방향에서 벗어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남은 삶에 있어서도 한 명, 혹은 두 명이면 나는 충분하다. 그래서 지금 삶도 족하다. 늦은 밤 전화해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하며, 김장김치 한 날 한포기를 바리바리 싸들고 와 보쌈에 같이 저녁 먹을 수 있는 친구 한 명은 있기 때문이다. 또다시 죽음과 이별의 이유 등으로 잃으면 어떠랴. 어디에 있건 그 한 명 다시 못사귀겠느냐.
6년전 즈음 안동에 귀향한 뒤부터 매달 내 건강을 염려하고 챙겨주시는 한 약사님께서 오늘 출간 축하한다며 손편지와 함께 소정의 금액까지 가게로 보내주셨다. 좋은 글과 응원의 메세지도 틈만 나면 보내주신다.
내가 생각한 삶은 결국 이런 모습이다. 내가 힘겹다면 그 이유는 하나다. 지금의 삶이 내가 생각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가 갈수록 바뀔 여지도 없다는 게 잘 느껴진다. 그래서 슬프다. 끝이 보이지 않는 슬픔이다.
바다가 보이는 마을에서 가을에 담궈둔 머금주를 마시는 상상을 한다. 마지막 남은 나의 한 명과 함께. 그리고 허물을 부수기 위해 꽃을 던지고, 우리는 그 잔해 속에서 장미꽃을 피워내는거다. 내 삶, 그러면 된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