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부부의 좌충우돌 배낭여행기(22화)
세비야 숙소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그라나다로 가는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런데 승강장에 가보니 같은 출발 시간에 그라나다행 버스 두 대가 나란히 있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똑같다. 한 버스로 가서 운전기사에게 티켓을 보여 주었더니 이 차가 맞다고 한다. 한번 더 확인하는 차원에서 옆 버스의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티켓을 보여 주었더니 그 사람은 또 자기 버스가 맞다고 한다. 황당하기 그지없다.
난감해하고 있는데 탑승하러 줄 서 있던 승객 중 한 사람이 다가와 티켓을 보여 달라고 한다. 그러더니 그라나다 행 버스는 1, 2가 있는데 내 티켓은 1이라고 적혀 있으니 이 버스가 맞다고 알려준다. 그제야 버스 앞에 있는 번호 1과 2가 눈에 들어온다. 별것 아닌데도 긴장을 하다 보니 보이지 않았던 거다. 다 같이 크게 웃었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3시간 달려 그라나다에 도착했다. 여기 버스는 어째 중간에 쉬지를 않는다. 택시를 타고 예약해 둔 숙소로 들어왔다. 깔끔하고 매우 쾌적하다. 세비야의 숙소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데도 훨씬 좋다. 짐을 대충 풀고 오후 5시쯤 밖으로 나갔다.
그라나다에서의 첫날, 플라멩코 공연을 보기로 했다. 사전에 남편이 공연 예약을 하는데 극장식 공연장에서도 볼 수 있고 동굴에서 하는 공연도 볼 수 있단다. 동굴에서의 공연이 무용수들을 가까이 볼 수 있다고 해서 우리는 동굴 공연을 택해 예약을 했다. 그라나다 누에보 광장을 한 바퀴 돌고 버스를 타고 공연장으로 갔다. 버스에서 내려 공연장까지는 오르막길을 걸어가야 한다. 걷다 보니 오른쪽 저 멀리 붉은색 건물들이 보인다. 그 유명한 알람브라 궁전이다. 존재 자체가 신비롭다.
▲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보는 알람브라의 야경
ⓒ 김연순
드디어 플라멩코 동굴 공연장에 도착했다. 안내 받아 들어간 동굴은 예상보다 넓고 환했다. 하나 둘 예약한 사람들이 자리에 앉았고 좌석이 다 차자 서비스로 음료를 준다고 한다. 우리는 와인을 한 잔씩 주문했고 한 모금 마시며 옆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눴다. 곧이어 중앙의 조명이 꺼지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 동굴 공연장의 플라멩코 공연
ⓒ 김연순
음악이 흐르며 탭 댄스처럼 '딱딱딱' 구둣소리가 먼저 들린다. 이윽고 보랏빛 무대 조명과 함께 까만 무대복을 입은 여성 무용수가 등장했다. 격렬한 춤사위가 시작되었고 박수 소리와 함께 공연장은 순식간에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다음 등장한 여성과 남성 듀엣 공연은 더 다채롭고 풍성한 춤사위를 보여 주었다. 세 번째 등장한 무용수는 등장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일단 눈빛이 사람들을 꿰뚫어 보는 듯 강렬했다. 격렬한 음악에 맞춰 구둣소리 역시 경쾌하면서도 묵직한 힘이 있고 춤추는 동선에서 강렬한 아우라가 느껴진다.
내젓는 팔과 다리 그리고 회전할 때마다 휘감기는 드레스의 파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귀청을 뚫을 듯한 구둣소리는 마치 공연장 바닥을 뚫을 것 같았다. 무언가 잡아먹을 듯한 그의 강렬한 눈빛은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분노의 표현으로도 보이고, 끓어오르는 열정의 표출로도 보인다. 어찌나 춤사위가 강렬한지 내 앞을 지날 때면 찬바람이 마구 일어난다.
두어 차례의 공연이 더 있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조명이 켜지고 공연은 끝났다. 내가 뭘 본 거지 싶을 정도로 혼이 나갔다. 빛과 소리, 춤과 의상이 혼연일체가 된 무용수들의 공연은 너무도 멋졌다. 한 시간의 공연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혼을 쏙 빼놓은 동굴 속 플라멩코 공연, 다 보고 나니 마치 온몸이 정화되는 것 같다. 영혼까지도 맑아지는 것 같다. 그라나다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다.
공연장을 나와 흥분을 가라앉히며 걸었다. 알람브라 궁전이 보이는 니콜라스 전망대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석양을 보러 온 사람들이 이미 가득하다.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고 석양을 보기에 좋은 위치의 카페로 들어갔다. 알람브라에 왔으니 알람브라 맥주 하나와 상그리아를 주문했다. 석양의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고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온몸을 감싸며 행복감에 도취되었다. 하늘의 색감은 완벽하게 아름다웠고 여행 중 최고로 행복한 하루였다.
▲ 골목 안에 있는 그라나다 대성당. 외벽에 가로수로 오렌지 나무가 있다.
ⓒ 김연순
다음날 아침, 호텔에서 제공하는 조식은 깔끔하고 정갈했다. 여유 있게 아침을 먹고 숙소를 나섰다. 걸어서 5분, 그라나다 대성당에 도착했다. 대성당은 골목에 자리하고 있어 얼핏 보면 성당인지 아닌지 구분이 잘 안 간다. 성당 주변으로 가로수들이 있는데 모두 오렌지 나무다. 흰색 벽에 초록색 나뭇잎, 그리고 노란색 오렌지가 대비를 이루며 산뜻하고 발랄한 느낌을 준다.
대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수많은 흰색 기둥들이다. 즐비하게 늘어선 높고 긴 기둥 사이로 금박의 장식들과 푸른색 돔, 그 아래 아름다운 색상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자리하고 있다. 금빛 장식과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해도 그동안 가본 도시의 대성당들에 비해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다.
▲ 그라나다 대성당 내부. 화려한 색감의 공간도 있지만 이렇게 흰 기둥의 단순한 소박함도 아름답다.
ⓒ 김연순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라나다 대성당은 내게 차분하고 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잠시 대성당에 머무는 동안 마음이 한없이 편안했다. 아무래도 나는 금빛 번쩍하는 화려한 장식의 성당보다는 소박하고 정갈한 느낌의 성당에 마음이 쏠리는 것 같다. 의자에 앉아 묵상을 하고 성당 한편에 있는 성물방에서 묵주 팔찌를 사가지고 나왔다.
뜨거운 한낮의 햇빛을 피해 숙소로 들어와 잠시 쉬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는지 한낮의 땡볕에 거리를 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운 나라의 문화, 우리도 따랐다. 오후 2시 30분부터 알람브라 궁전을 돌아보려 한다. 자세히 알고 싶어 미리 한국인 가이드 투어를 예약해 두었다. 시간에 맞춰 알람브라 궁전 매표소에 도착해 보니 다른 두 명의 신청자가 더 있다.
우리를 포함해 총 네 명이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투어를 시작했다. 놀랍게도 입장을 할 때 여권을 보여주어야 했다. 전 세계의 여행객들이 알람브라에 오기를 원하는데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몰리면서 입장권을 사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정확한 입장객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여권을 확인한다는 거다. 여권을 확인하는 관광명소는 처음이다.
그라나다를 오는 사람들은 알람브라를 보러 오는 거라고 한다. 나도 그렇다. 스무 살 무렵 기타 연주곡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처음 들었다. 거침없이 빠르고 화려한 현의 튕겨 나는 소리,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 저리고 아름다운 기타 선율에 단박에 매료되었다. 언젠가 스페인, 그중에서도 꼭 알람브라를 가봐야겠다고 그때 마음먹었다. 그리고 사십여 년 가까이 흘러 드디어 이제 왔다. 오랫동안 꿈에 그리던 알람브라, 과연 어떨까 몹시 설레며 마음이 두근두근 했다.
그라나다는 800여 년간 스페인을 지배한 이슬람 왕국 최후의 보루였다. 가톨릭에게 정복당하기 전까지 이슬람 왕국의 문화가 찬란하게 꽃 피운 곳이다. 고도로 발달한 이슬람 문화의 정수, 이슬람 문명의 아름다움과 정교함이 빛나는 현장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당한 마지막 이슬람 왕조의 숨결이 느껴지는 알람브라, 애잔함이 더 느껴진다. 알람브라는 그라나다에 있는 궁전과 성곽의 복합단지를 말한다. 아랍왕조 나스르 왕국의 궁전으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알람브라는 아랍어로 '붉은 것'이란 뜻이다. 이름답게 성채 전체가 붉은빛을 띠고 있다.
▲ 나스르 궁전의 사자의 정원. 12개의 사자상이 있는 물시계로 지금은 분수대로만 사용된다.
ⓒ 김연순
1230년부터 1492년까지 스페인을 지배한 마지막 이슬람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술탄 보압딜은 1492년 가톨릭 왕국의 이사벨왕과 페르난도 왕에게 항복했다. 오랜 포위 끝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던 보압딜은 항복의 조건으로 이곳에 남은 무슬림들의 목숨과 신앙의 자유를 내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스르 왕조는 끝을 맺게 되었고 이곳 알람브라는 이후 오랫동안 폐허 상태로 방치되어 왔다.
알람브라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건 미국 작가 워싱턴 어빙 덕분이다. 1832년 워싱턴 어빙이 이곳에 왔다가 알람브라의 아름다움에 반해 머물게 되었고, 알람브라 궁전과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엮은 에세이집 <알람브라 이야기>을 출간하게 되었다. 이 책이 널리 알려지며 전 세계의 사람들이 알람브라를 보러 스페인 그라나다를 찾게 된 것이다. 우리 부부도 그렇다.
알람브라의 최고 건축물은 누가 뭐래도 나스르 궁전이다. 화려함과 정교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이 공간은 이슬람 왕 술탄과 왕실 가족이 머무는 곳으로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14세기 중반의 건축물로 아라베스크 문양이 빼곡하다.
사자의 정원에 들어서니 중정에 원형의 대리석 물시계가 있는데 12마리의 사자가 빙 둘러 떠받치고 있다. 모두 대리석으로 된 조각품이다. 이 물시계는 유대인들이 바친 선물인데 당시에는 매시 정각에 사자들이 돌아가며 물을 뿜어냈다고 한다. 가톨릭왕국 하에서 이 원리를 알아내려고 물시계를 분해하는 등 애썼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저 분수로만 사용된다.
▲ 나스르 궁전의 가장 화려하고 정교한 '두 자매의 방'
ⓒ 김연순
나스르 궁전에서 화려함의 극치로 꼽는 곳은 '두 자매의 방'이다. 방의 이름은 벽면에 있는 두 개의 같은 모양의 창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팔각뿔 돔 천장에도 여러 개의 창문이 있는데 이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와 아름다운 조각들을 비춘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정교하다. 얼핏 보면 벌집 같기도 한 이러한 양식을 모카라베 양식이라고 한다.
천장에 빨려 들어가 넋을 놓고 보고 또 보았다. 저 높은 천장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문득 동굴의 종유석이 떠오른다. 마치 종유석을 정교하게 다듬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빛 아래 화려함의 극치인 이곳에서 어두운 동굴의 종유석이 떠오르는 건 참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천장을 가득 메운 장식은 종유석 모양이 맞고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가 코란을 받은 동굴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고개가 끄덕여지며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 연못과 건축물의 조화가 너무도 아름다운 아라야네스 정원
ⓒ 김연순
이곳을 돌아나가면 아라야네스 정원과 만나게 된다. 들어서자마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중정에 직사각형 커다란 연못이 있다. 그리고 연못에 파란 하늘과 코마레스 탑이 그대로 비친다. 그 앞에 서 있자니 그냥 말문이 막힌다. 잔잔한 연못은 하늘과 구름, 나무와 건물을 그대로 반사하고 있다. 살짝 흔들리는 연못에 비친 반사경에 그대로 빠져 버리게 된다. 또다시 한참 동안 넋 놓고 있다가 맞은편으로 가보았다. 맞은편도 마찬가지다. 이런 비경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 자체가 황홀경이다.
▲ 왕실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된 헤네랄리페. 수로에 떨어지는 물소리에 영감을 얻어 기타 연주곡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 만들어졌다.
ⓒ 김연순
나스르 궁전이 왕실 가족이 상주하는 일상적인 공간이라면 헤네랄리페는 별장으로 쓰인 여름 궁전이다.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사이로 분수와 물이 흐르는 연못이 있다. 길이가 50미터나 되는 수로 위로 가느다란 물줄기가 떨어지는데 이 소리에 특별한 사연이 있다. 바로 이 물소리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타 연주곡 프란시시코 타레가의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 탄생한 것이다.
스페인의 작곡가이자 기타 연주자인 타레가는 이곳에 와서 연못 위에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었는데, 가만히 듣고 있자니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고 바로 그것을 기타 연주곡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가이드가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틀어준다. 눈을 감고 들었다. 기타 현이 튕기며 물소리가 들린다.
알람브라 곳곳을 둘러보며 '무한'의 관점을 상징하는 아라베스크 문양, 그리고 분수를 통해 흐르는 물의 흐름으로 이슬람 정신세계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건축양식과 더불어 역사적 사건들을 배경으로 설명해 준 가이드 덕분이다. 알카사바(병영)까지 둘러보고 투어를 마쳤다. 붉은빛 알람브라에는 오랜 시간 동안 켜켜이 쌓여온 사람들의 이야기와 삶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듯하다. 그리고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람브라의 내장된 수많은 이야기 속에 나도 풍덩 빠져 들었던 것 같다.
▲ 알람브라 맥주와 타파스. 그라나다에서는 맥주는 시키면 타파스가 무료로 나온다.
ⓒ 김연순
거리에 나오니 타파스 바가 꽤 많이 보인다. 적당한 곳으로 들어가 앉았다. 메뉴판을 봤는데 맥주 하나를 주문하면 타파스 하나가 무료다. 안내 책자에서 보긴 했는데 정말 그렇다. 그라나다, 여러모로 좋다. 맥주의 종류는 많았으나 그라나다는 알람브라 맥주지, 하며 우리는 알람브라 맥주를 주문했다. 난 한 잔 마셨는데 남편은 연달아 두 잔을 마신다.
주문한 타파스는 다 맛있다. 시금치 크로켓이 특히 맛있었고 감바스 필필은 맛있긴 하지만 그냥 먹기엔 너무 짜다. 빵을 주문해 함께 얹어 먹으니 간도 적당하고 맛도 좋다. 저녁 식사로 찾아간 한식당도 맥주를 시키면 타파스가 그냥 따라 나온다. 계란말이와 야채전을 주문했다. 밥도 배부르게 먹고 시원한 맥주에 넘치는 타파스, 충만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