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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삿갓 Mar 09. 2024

26일, 생애 첫 남인도

20대 끝자락에서 만난 인도

EP.13 기차여행


가장 사랑하는 고아를 떠나야 했다. 느긋한 모습을 보이기가 싫어 그 여느 때보다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별할 땐 확실히 끊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련이 남는다. 미련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힌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고아가 떠올라 비교할 것이다. ‘아, 고아는 이랬는데. 고아는 이러지 않았는데’ (참 빨리도 깨달았다. 연애할 때나 깨달을 것이지. 이제 후회하면 뭐하나, 멍청했던 자신을 탓할 뿐이다. 이 와중에 옛 연인을 떠올리는 걸 보니 난 정말 못났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을 나섰다. 우리는 벵갈루루(Bengaluru)로 향했다.  



기차에서 생긴 일

고아에서 벵갈루루로 가기 위해선 약 14시간 동안 기차를 타야 했다. 인도 기차가 재밌는 점은 도착 시간이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다음 일정이 있다면 마음 졸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편히 타면 된다. 그래도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빠르다 싶으면 정차 시간을 늘리고, 늦다 싶다면 냅다 달린다. 분명 연착될 것 같은데, 얼마 있다 보면 도착역에 가까워져 있다. 이 재밌는 기차를 14시간 동안이나 타게 된다니, 벌써 즐거웠다.  


SL 칸에는 젊은 인도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에너지 넘치고 소란스러웠다. 말을 걸까 걱정스러웠다. ‘아, 나 영어 못하는데 붙임성 좋은 친구들이면 어떡하지?’라며 긴장했다. 그들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서로 힐끗힐끗 쳐다만 볼 뿐 말은 걸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거나, 대화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도 홀로 영상을 보거나 책을 읽었다. 간혹 바퀴벌레가 나타났는데 젊은 인도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잡았다. 벽면으로 올라가는 바퀴벌레를 발견하자 냅다 슬리퍼를 벗어 잡았다. 역시 현지인은 달랐다. 바퀴벌레를 무서워하는 롱님 때문에 작가님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나도 바퀴벌레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내식을 먹고 있을 때였다. 음식 냄새가 나니 참을 수 없었나 보다. 좌석에 있는 작은 틈을 이용해 계속 왔다 갔다 움직였다(밥 위로 올라오는 끔찍한 상상을 했다, 밥맛 떨어지게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름 재밌었다). 바퀴벌레를 죽일지 말지 고민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기내식을 먹었는데 나는 생각보다 비위가 좋은 것 같다.   


긴 기차여행으로 점차 지쳐갔다. 젊은 인도인들은 카드놀이를 하며 지루함을 이겨내다가도 기차가 정차하면 어김없이 밖으로 향했다. 바람을 쐬기도 하고, 간식거리를 사기도 했다(나도 하고 싶었는데 무서워서 못 했다. 한국에서 그러면 기차를 놓친다. 아직 두려움이 많은 아이였다). 그들의 태도가 좋았다. 그들은 느림을 불평으로 여기지 않았다. 받아들이고 즐겼다. 밤공기가 얼마나 상쾌했을까. 빨간 티셔츠를 입은 친구가 밖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환하게 웃는다. 안에 있는 친구들을 찍는 중이었다. 저 여유가 무척이나 좋았다. 불편하다 느끼면 더욱 불편하고, 불편함을 즐기면 더 이상 불편이 아니다. 끝까지 낭만을 즐겼으면 좋았을 텐데 산통 깨는 이들이 있었다.

      

바퀴벌레와의 숨바꼭질은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만히 숨어 있으면 서로가 편한데 바퀴벌레는 계속해서 목숨을 건 게임을 걸어왔다. 잡히면 죽고, 안 잡히면 사는 죽음의 숨바꼭질이 시작됐다. 요리조리 바닥을 활보하는 바퀴벌레를 잡기 위해 탭댄스를 췄다. 탁! 탁! 탁! 요놈 정말 빠르다. 협동작전까지 펼친다. 한 놈이 죽을 것 같으면 다른 한 놈이 시선을 빼앗았다. 죽고 죽이는 싸움이 계속되다 결국 항복을 외친 건 인간이었다. 앞으로도 인간이 이길 일은 없을 것이다. 하늘이 내린 번식력과 생명력을 한낱 인간이 어찌할 것인가(신을 원망하기엔 이미 늦었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자. 바퀴벌레는 우리의 게임 파트너다. 우린 불편할 뿐이고 죽는 것은 바퀴벌레이지 않은가. 와, 방금 나도 어쩔 수 없는 이기적인 인간임을 깨달아버렸다. 내가 한 말은 잊길 바란다. 인간이 고등생물이어도 생명을 좌지우지할 권리는 없다. 바퀴벌레의 운명은 여러분에게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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