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필로그
한 장의 다이어그램이 있었다. 세계 최대 광고 에이전시 그룹 WPP가 낸 보고서의 일부 내용을 누군가 요약한 것이었다.
그냥 흘려볼 수도 있는 자료였지만 그걸 보는 순간, 싸한 느낌이 들었다. 광고대행사 임원이기 때문에 어쩌면 더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는 이미지였다.
그 다이어그램은 지난 10년간 광고주의 ‘요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한 장에 요약하고 있었다.
10년 전, 광고주의 요구의 60%를 차지하던 것은 크리에이티브 캠페인이었다. TV 광고, 유튜브 영상 캠페인, 브랜드 필름, 인지·호감도를 올리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광고 캠페인이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그 비중이 20%로 줄어 있었다. 정확히 3분의 1 토막.
나를 얼어붙게 만든 건 숫자 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였다.
“수십 년 동안 광고대행사가 해온 ‘본업’이, 이제 광고주의 전체 수요에서 5분의 1짜리 메뉴로 내려가고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현장에서 몸으로 느끼고 있던 변화이기도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경쟁 비딩에 올라오는 과제의 제목이 달라졌다.
예전엔 이런 표현이 익숙했다.
“브랜드 인지도 제고 캠페인 제안”
“신제품 런칭 통합 커뮤니케이션 캠페인”
“브랜드 자산 강화를 위한 TV/디지털 영상 캠페인”
이제는 이런 이름이 더 흔해졌다.
“퍼포먼스 마케팅 통합 운영 제안”
“이커머스 전환 극대화를 위한 솔루션 제안”
“데이터 기반 CRM·리텐션 마케팅 구축”
“브랜드·퍼포먼스 통합 미디어 전략 및 운영”
브랜딩 캠페인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메인 요리’와 ‘사이드 메뉴’ 중간 사이 어딘가로 밀려났다는 느낌이 분명히 있었다.
그저 현장에서 체감하던 분위기를, WPP의 다이어그램이 숫자로 확인시켜 준 것뿐이었다.
업계에서 “브랜딩 캠페인”이라고 부르는 TV나 유튜브 영상 캠페인은 확실히 줄었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성과 지표와 더 가깝게 붙어 있는 일들이었다. 전환율, ROAS, CRM, 커머스, 앱 설치, 회원 가입, 리텐션, LTV…
과거 광고대행사의 롤은 오랫동안 비교적 명확했다.
“소비자를 설득하는 창의적인 광고를 만드는 것.”
브리프는 대체로 이렇게 시작됐다.
“우리는 이런 브랜드입니다.”
“우리의 타깃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이런 미디어를 통해 전달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차별화된 콘셉트를 잡고,
기억에 남는 크리에이티브를 만들고,
매체 전략과 함께 캠페인으로 묶어 제안했다.
그리고 그게 광고대행사의 주요 수익원이자, 존재 이유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브리프의 무게중심이 달라졌다.
“ROAS를 이 정도까지 끌어올리고 싶습니다.”
“퍼포먼스 캠페인과 브랜딩 캠페인을 어떻게 통합할 수 있을까요?”
“자사몰 매출 비중을 올리고 싶습니다.”
WPP의 다이어그램 처럼, 이런 요청은 더 이상 ‘예외적’이거나 ‘부가적인’ 영역이 아니다.
광고주가 원하는 일이 바뀐다면 광고대행사의 역할도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퍼포먼스 대행사들이 생겨났고 광고주 요구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고 해서, 크리에이티브의 시대가 끝난 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광고’라고 부르던 영역 바깥으로,
크리에이티브가 흩어져 나가고 있다는 것이 좀 더 맞는 말 같다.
사람들은 여전히 브랜드를 찾고, 비교하고, 선택하고, 이야기한다. 다만 그 과정이 예전처럼 “광고 – 인지 – 구매”의 단순한 선형적 흐름으로 이어지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소비자의 구매 여정 변화는 광고주가 크리에이티브 캠페인을 요청하지 않게된 큰 이유다.
현재의 소비자 구매 여정은 어떻게 변화 되었을까? 광고를 통해 제품을 인지하거나 구매를 고려하는 하는 영역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구매를 고려하고 나면 검색을 하고, 블로그와 유튜브를 뒤적이다가 쇼핑 앱에서 가격과 리뷰를 비교하고, 인스타그램이나 틱톡에서 실제 사용 후기를 보고, 친구·지인의 이야기를 다시 확인하고, 결국 그 모든 탐색과 평가의 조각을 합쳐서 ‘하나의 선택’을 내린다.
어떤 사람은 그 과정에서 세탁기 하나를 사기 위해 며칠 동안 유튜브 리뷰를 샅샅이 뒤진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잠자리에 들기 전 침대에 누워 아무 생각 없이 숏폼을 넘기다가 갑자기 '필터 교체가 필요 없는 미니 공기 청정기' 영상을 보고 5초 만에 링크를 눌러 구매를 한다. 원래 사려고 했던 물건이 아니었는데도 짦은 영상 하나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면 좋을 거 같은 이유'가 한 순간에 완성된다. 그리고 홀린 듯 구매 버튼을 누르는 일도 허다해졌다.
'과잉 탐색' '순간 발견' 두 개의 상반된 소비자의 구매 여정이 혼재하고 있다. 이 두 가지 모두 TV광고와 같은 전통적인 마케팅 방법론으로는 대응하기 어렵다.
이 어려운 구매 여정의 변화가 어느새 마케팅의 무대가 되었다. 예전처럼 한 번의 대형 캠페인으로 마음을 빼앗는 것만으로는 목표 달성이 어려워졌다. 앞으로 연재될 글에서 내가 “탐색과 발견의 시대”라고 부르는 변화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전통적인 광고캠페인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큰 외침을 통해 사람들을 주목하게 만들고 설득하는 방식”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대신 이제는 탐색과 발견이 일어나는 수많은 작은 순간들 속에서, 브랜드가 어떻게 보이는지를 설계해야 한다. '이제 크리에이티브 캠페인의 시대는 끝났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크리에이티브의 무대가 바뀌었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WPP의 다이어그램을 보며, 나는 두 가지 질문을 떠올렸다.
첫째, “광고주의 요구가 이렇게 바뀐 시대에, 광고대행사는 광고주에게 어떤 가치를 줄 수 있을까?”
둘째, “이 변화를 처음 겪고 있는 주니어 마케터들에게,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하는 것이 어떻게 달라져야 한다고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길에 독자들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