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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55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by 수달


검찰청에서 걸려온 전화


"여보세요. 저는 ㅇㅇ검찰청 수사관인데요. ㅇㅇ님 되십니까?"


2년 전, 낯선 전화를 받았다. 보이스피싱을 의심하게 되는 멘트였다. 긴장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과거사 위원회에서 진실규명이 필요한 사건을 조사해, 재심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고기잡이 중 납북되었다가, 불법구금 등 억울하게 유죄판결받은 분들을 구제하고자 합니다."

"아버님, ㅇㅇ님이 동해에서 어로작업 중 납북되셨다가, 귀환 후 반공법 위반으로 재판받은 사건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재심 청구에 동의하시나요?"


처음엔 무조건 보이스피싱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과 과거사 위원회 이야기를 듣다 보니, 사기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뉴스에서 억울하게 옥살이 한 분들을 구제한다는 내용을 본 기억이 났다. 큰 형님과 통화하면서, 납북어부의 억울함을 해소하는 절차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55년 전, 동해바다에서 일어난 일


아버지는 동해 바닷가 마을에 고기 잡는 어부였다. 부지런하고, 적극적인 성격이라, 고기잡이도 최선을 다했다. 그 덕분에 30대 젊은 나이에 3척의 어선을 가진 선주가 되었다.


보통 선주는 배를 타지 않는다. 배를 빌려주면, 선원들이 고기잡이를 하고, 잡아온 고기의 절반을 선주에게 주고, 나머지 절반으로 연료 등 비용을 충당하고 남은 돈을 선원들이 나누었다.


아버지는 배 3척을 대출을 받아 구입하였다. 그래서, 대출금과 이자를 감당하기 위해 선주임에도 직접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다. 어느 날, 고기잡이를 하던 중, 북한군 경비정에 의해 강제로 북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했다.


아버지의 배는 1968년 11월에 납북되었다가, 이듬해 1969년 5월에 돌아왔다. 약 7개월간 억류되어 있으며, 북측으로부터 온갖 회유와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특히, 아버지가 배의 주인 선주라는 걸 알고 더 강하게 압박했다.


당시, 국제 인권기구도 북한의 행위를 규탄하고, 속히 돌려보낼 것을 촉구했다. 그 덕분에 7개월 만에 귀환할 수 있었다. 배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어머니와 가족들이 항구로 마중을 나갔다. 하지만, 정보기관에서 아버지와 선원들을 모두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다시 고문과 취조가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가족들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하고, 감금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남한에 돌아온 지 6개월 만인 1969.11월에 판결이 나왔다.


반공법, 수산업법 위반,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어선조정) 1년 6개월


(반공법은 공산계열 활동 관련 내용을 규제하기 위해 1961년 제정되었으나, 1980년 폐지되었다)



아버지는 남한에 돌아온 날부터 법원 판결까지 약 6개월을 감옥에 갇혀 있었다.

다행인 것은 집행유예가 되면서, 바로 감옥에서 풀려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범법자가 되었고, 3척의 어선을 운영하는 선장이 1년 6개월간 배 운전을 못하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장기간 고문과 취조를 받으며, 건강이 너무 안 좋아졌다. 감옥에서 나온 후, 외부활동을 못하고 집에만 계셨다. 그리고 4년이 지난 1973년 5월 고혈압으로 사망하셨다.



30대 초반의 젊은 선장,

어선을 3척이나 보유한 선주,

선주이면서, 선장이 되어 고기잡이하던 젊은 어부


이 젊은 어부가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북한에 억류되었다 풀려난 후,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탄원서


드디어 재심청구가 이루어졌다. 2년 전 6월, 검찰청으로부터 재심을 청구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대검 홈페이지에서 재심 청구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와 유족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그러고 나서 1년이 지났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다. 비슷하게 옥살이하신 분들 사례를 알아보았다. 3~4년 전부터 재심이 이루어지고 있고, 대부분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무죄 판결을 받은 후에는 소송을 해, 손해배상도 받았다고 한다.



1년을 기다리다가, 답답한 마음에 법원 민원실에 전화를 했다.


"법원 업무가 너무 많이 밀려있어요."

"재심 청구 건은 워낙 오래전 일이다 보니, 다른 사건에 비해 시급성이 크지 않다고 보시는 것 같아요. 재심이 빨리 진행되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통화과정에서, 신속 재판을 촉구하는 탄원서가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망 000의 아들 000입니다."로 시작했다.

납북사건의 경위와, 재판, 그리고 이어진 아버지의 죽음과 가족들이 겪은 고통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를 했다.


"본인 의지나 행위가 아닌, 남북분단 상황 때문에 억울한 옥살이를 했습니다. 이로 인해 무고한 젊은 어부가 죽임을 당하고, 남은 가족은 고통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이제 그 고통과 아픔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도록 빠른 시일 내에 재판을 진행해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진정서를 작성하면서, 납북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평생 어부로 살아오던 분이 갑작스러운 납북으로 얼마나 힘드셨을까 공감이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지금 91세)는, 30대 나이에 과부가 되었고, 어린 4남매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셨다.





55년 만에, 무죄판결


탄원서 제출하고 몇 주 지나, 법원에서 재심 개시 통보가 왔다. 이후에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2024년 9월 9일

드디어, 법원으로부터 통보를 받았다.


"망 최기문, 무죄"

"피고인들의 어로저지선 월선 및 북한 지배지역으로의 탈출에 대한 범의를 포함, 공소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없으므로, 무죄를 선고한다."


55년간 반공법 위반의 굴레를 쓰고 있었는데 이제 누명을 벗게 되었다.

고의로 어로한계선을 넘었다는 증거도, 북한으로 탈출하려 했다는 증거도 없었는데, 구속영장도 없이 불법 구금하고, 고문하고, 유죄판결까지 내리게 되었을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놀라운 것은 이런 사례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통일부 발표에 따르면, 1955년부터 1992년까지 북한 경비정에 납치되었다 돌아온 어선은 500척이 넘는다고 한다. 납북어민 수는 3700여 명, 이중 400여 명은 억류뒤 돌아오지 못했고, 3200여 명이 귀환했다고 한다. 아버지처럼 억울한 판결을 받은 분들이 많이 계시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무죄 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한 것은 참 다행이다. 이번 무죄 판결을 시작으로 앞으로, 형사와 민사 보상청구를 통해, 가족들이 받은 고통을 조금이나마 보상받는 절차를 진행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보상금이 또 다른 분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피해보상청구를 막 시작할 당시에는....

(피해보상 청구결과는 다음 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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