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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학나경 Nov 11. 2022

야망백수와 나눈 생업과 탈주에 관한 대화

학나경 인터뷰 #19 | 먹고 사는 얘기 하는 뉴스레터 '풀칠' 운영자.

학교, 나이, 경력을 빼고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학/나/경은 내가 살아온 자취이기도 하다. 바라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내 앞에 학/나/경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건, 혹은 내가 내 이름 앞에 학/나/경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려고 부단히 노력했건 간에, 내가 밥을 벌어 먹고 살기 위해서는 내 앞에 붙은 학/나/경이라는 수식어를 이용해야만 할 때가 있다.

그래서 밥벌이란 내가 하는 행위 중 가장 모순된 행위다. 누군가에게는 모순의 행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나를 둘러싼 수식어를 업데이트하기 위한 행위. 뭐가 되었건, 우리는 서로의 밥벌이의 고단함을 나누며 살아간다. 그래야만 계속 풀칠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으니까.

'밥벌이 이상의 풀칠을 위하여' 먹고사는 얘기를 전하는 뉴스레터 '풀칠'. 학나경은 풀칠하며 사는 얘기를 전하는 사람들이 궁금했다. 그래서 풀칠의 4명의 운영진 중 한 명인 야망백수와 이야기를 나눴다. (김지연 작성)

손로운 뉴스레터 <풀칠>은 밥 벌어먹고 사는 얘기를 하지만, 사실 막상 직장 생활 얘기만을 다루지는 않는데.

야망백 <풀칠>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일’ 자체라기보단, 먹고 살기 위해선 노동을 해야하는 우리의 존재조건이다. 그래서 일보단 밥벌이란 표현을 주로 쓰는 거고. 이 존재조건의 디테일엔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면모가 있는데, 그 지점을 짚어내고 증명하는 게 <풀칠>을 발행하는 이유다.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결국엔 삶이 주제인 셈이다.


'풀칠' 뉴스레터, <탈주> 일부 발췌

김지연 (야망백수가 쓴) 탈주에 관한 글을 봤다. 본인에게 탈주의 경험이 주는 의미는.

야망백수 (탈주하지 않고 계속 회사에 다녔으면) 이력이 훨씬 더 쓸만하긴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탈주하면서) 그렇게 살면서 하고 싶은 얘기도 많이 쟁여놨고, 경력이 오피셜하게는 없을지언정 그런 일들이 내 경쟁력을 낮추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걸 알아봐 주지 못하는 사람들은 있겠지만.

김지연 낙관이 중요한 것 같다. 내가 그만두면 나 아무것도 못해, 이런 생각으로는 탈주를 할 수 없다.

야망백수 낙관이 바닥났을 때가 진짜 많았다. 사실 때려치울 때만 낙관적이고, 나머지 순간은 항상 비관적이었다.

김지연 그것도 사실 탈주를 여러 번 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존버한 사람도 존버한 사람만의 철학이 있겠지만, 탈주를 여러 번 해본 사람만이 하는 생각이 있다. 다들 버터야만 거기서 뭔가를 얻는 게 있다라고는 하지만, 사실 탈주해야만 얻는 것도 있다. 그만두어도 괜찮은 경험을 해봐야 그만둬도 나쁘지 않다는 걸 알 수도 있다. 우리 제도권 교육에서는 그만둬도 괜찮아, 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무서운 게 당연하다. 새로운 시도를 하기 두려울 수 있다. 정석적으로 루트를 밟아온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야망백수 탈주가 필요한지 아닌지는 자기가 제일 잘 아는 거고, 사실 매몰비용이 크면 탈주를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다. (나의 경험을) 돌아보니까, 나는 오히려 매몰비용이 크지 않을 때, 엄청나게 대단하지 않을 때 빨리빨리 때려치우는 걸 많이 했다.

손로운 나는 반대로, 뭔가를 쌓고 나서, 견고한 것이 갖춰지고 나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든지 쉬어도, (기존에 쌓아둔) 견고한 게 있으니까 그걸 다시 끄집어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탈주를 안 하고) 그걸 갖출 때까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야망백수 그것도 맞다. 스스로가 결정한 거니까, 나 같은 탈주닌자들의 말에 괜히 휩쓸릴 필요 없다.

손로운 나는 첫 번째 회사에 다닌 기간이 3년 3개월이고, 두 번째가 7개월이다. 그렇지만 (이직을) 준비한 건 한 4개월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그 후의 3개월은 이직을 하려고 했는데 실패해서 길어진 거다. (나의 탈주 일기는) 약간 그런 식이다.

김지연 나도 그런 편이다. 전 직장에 1년 8개월 있었는데, 오래 다니고 싶어서 다닌 게 아니라 그냥 이직이 안 돼서 오래 다닌 거다. 현실과 타협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손로운 나는 지금 일하고 있는 이유가, 결국에는 다 남은 인생, 가장 긴 시간을 남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내가 지금 이 일(생업)을 하고 있는 이유는, 언제든 내가 즐거운 일을 했다가 실패했을 때 다시 이 궤도에 올라탈 수 있게끔, 다시 올라타는데 손색없을 만큼의 실력을 갖추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최대한 빨리 실력을 닦고 나서, 미련 없이 그만두고 나만의 공간을 차려서 살고 싶다. 그런데, 너무 지금의 일(생업)에만 몰두하다 보면, 내가 즐거울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잃을까 봐, 내가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한에서 다른 것들을 붙여가고 있다. 사람들을 집에 초대한다던지.

'풀칠' 뉴스레터, <자아 탐구> 일부 발췌

김지연 비밀 스케치북이 있다고 들었다. 만화로 그리고 싶은 소재가 많은데, 못 그렸다고 했다. 어떤 소재로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그리고 왜 그리지를 못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 이유는.

야망백수 나는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안 하고 살았다. 그런데 어쩌다가 아이패드가 우연히 생겼다. 그때가 백수일 때라서, 그림을 그렸다. 그림과 텍스트를 붙이는 게 되게 재미있더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 하나, 문장 하나로까지 줄이는 작업이 재밌었다. 그래서 그것을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일(생업)을 하면, 일이 중요하고,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회사가 성공하는 게 중요하니까 (많이 하지 못한다).

야망백수가 그리는 <풀칠러 스케치>

김지연 학/나/경과 같은 요소를 빼고 자신을 소개한다면.

야망백수 그냥 000입니다. 라고 하는 게 좋다. 돌고 돌아서 그냥 담백하게.

김지연 원래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고 한다.

야망백 실패할게 뻔한 형용사로 설명하려 애쓰는 것보다 설명을 시도하지 않은 채로 두고 싶다. 그게 더 적확하다는 생각이다.

김지연 맞다. 내가 나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건데, 내가 그거에 맞게 행동해야 할 것 같고, 거기에 갇히게 된다. 나를 둘러싼 포장지를 내가 스스로 만드는 거다. 광고 카피처럼.

야망백수 나도 물론 텍스트를 다루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사실 언어의 설명력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는다.



손로운 요즘 어떤 생각을 하는가.

야망백수 위태롭다는 생각을 한다. 회사를 다니면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 혼자 자유로웠던 시절에는 똑같이 위태로웠지만, 이렇게 둥둥 떠다니는 느낌은 아니었다. 회사를 다니면 회사와 한 몸이 된다. (그 전에는 나 개인이) 단독으로 존재했다가, 세포가 된 거다. 큰 기능 안에서 작은 기능을 담당하는. 그래서 회사에 다니면, 일상의 많은 것들이 (회사와) 엮이기 시작한다. 어떻게 보면 정규직이라 안정적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정규직이라 깊게 예속됐다, 라고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후자를 생각하면 위태롭다는 생각을 한다.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게 아니라 물결에 흘러다니는 느낌이다.

김지연 내가 배에 묶여 있어서, 바다에 빠질 위험은 없는데 사실 내 의지대로 배를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다.

야망백수 사회에 깊게 들어간 거다. 그래서 위태롭다. 그리고 또 하는 생각은, 간결하게 살면 어디까지 간결하게 살 수 있을까, 에 대한 생각도 한다. 사회에서 필수라고 하는 것들이 사실은 필수적이지 않은 것들이 많다. 그래서 그런 절차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학나경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hakna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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