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의 회귀 - 음악편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하고 싶은 말, 하려 했던 말
이대로 다 남겨두고서
혹시나 기대도 포기하려 하오.
그대 부디 잘 지내시오.
*
기나긴 그대 침묵을 이별로 받아 두겠소.
행여 이 맘 다칠까
근심은 접어 두오.
오, 사랑한 사람이여
더 이상 못 보아도
사실 그대 있음으로
힘겨운 날들을 견뎌왔음에 감사하오.
좋은 사람 만나오.
사는 동안 날 잊고 사시오.
진정 행복하길 바라겠소.
이 맘만 가져가오.
노래는 사람의 감정을 파고든다. 오랜 역사를 굳이 따지지 않아도 너무나 오래전부터라 그 본원은 말로 다 헤아릴 수 없다.
저 먼 옛날, 신석기시대였을까? 구석기시대였을까? 아니면 그보다도 훨씬 더 이전부터였을까? 그걸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하나는 활동 그 자체에서 느끼는 기분과 감정을 담아 거의 무의식적으로 흥얼거렸던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이것은 사실 바람의 소리, 시냇물 소리, 바위와 숲의 소리 등 인간이 어떻게든 자연을 모방한다는 서양식 이론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것을 자신들 세계에서만 발굴한 놀라운 학술적 발견인 것처럼 ‘서양 철학’의 일부로 확정 짓는 것은 개인적으로 반칙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바는, 음악에는 늘 인간의 감정이 올려져 있다는 것이다. 인간 감정과 음악의 음률은 마치 동기화된 빛의 흐름처럼 같다. 이 동기화를 따로 구별하여 설명하려 들면 음악은 수학이나 논리가 되고 만다. 우리가 감동하는 부분은 그 우주적·논리적·수학적 비례나 견고함만은 분명 아니기에, 예술을 감상하는 시각은 눈을 감아도 열려 있다.
<편지>는 심심하던 차에 아무 생각 없이 찾아본 영화 <동감>(2022)을 보던 중에 OST로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심취하여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다가 그만, 영화는 외면하고 음악을 찾아 인터넷을 헤매게 만든 곡이다.
물론 노래를 처음 들어서 인터넷을 뒤진 건 아니고, 문득 ‘이 노래에 숨겨진 이야기는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한 탓이었다.
가수 김광진은 1964년 9월 17일생이다. 현재가 2024년이니까 60년대생이라고 하면, 허~! 꽤 오래전 사람이다.
그게 정치인이든, 경제인이든, 문학가이든, 예술가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이, 상당히… 현재 우리가 영유하는 시대를 지나쳐 있는 것도 사실이다. 즉, 요즘 젊은 세대들의 말대로 하면 ‘그건 그저 옛날 일’이고, 잊히는 것이 마치 당연한 듯한, 왠지 별로 자랑스럽지도 않고, 괴롭고 복잡하며 따지고 싶지조차 않은 지나간 시간 안의 한 줌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아보려고도, 이해해 보려고도,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1960년대생부터 1970년대생의 삶은 현시대에서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에 놓인 아무도 모르는 작은 섬과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그 섬을 사랑하고, 남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보다는 그 섬에서 평안하기를 바라는 이들도 있다.
조금만 색깔이 바래면 옛것 취급하며 쓸모없는 것들로 규정하는 세상 한구석에서, 나는 귀한 보물이라도 찾아낸 듯 그의 음악에 귀 기울인다.
인위적인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멜로디를 따라, 감성을 따라, 기억을 따라, 저절로 흘러간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나름대로 시대와 세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내게… 왜일까?
그것은 그의 데뷔곡인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라는 곡의 첫 멜로디만 들어도, 정말이지 가사는 필요 없이 멜로디만 들어도, 그가 도대체 음악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 말하고자 했던 것이 어떤 느낌인지 와닿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부분은 어렵다. 아무리 위대한 음악가라 하더라도 자신이 쓴 곡에 대해, 자신이 표현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름표나 요약된 주제어처럼 딱 정해지지 않은, 형용하기 어려운 그 무엇에 대하여, 굳이 논리적으로 설명해서 이해시킬 이유나 당위가 없기 때문이고, 그게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그 무형의 흐름이야말로 어쩌면 ‘과정’인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대입하여 느낄 수 있는 예술의 진면목인지도 모른다.
위대한 문필가들도 자신의 글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 급작스레 인터뷰라는 걸 할라치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라는 반응을 보이며 그저 동그래진 눈망울로 가벼운 질문에도 진지한 답변을 한다. 개그 프로그램에 다큐나 정치 전문가가 나와서 답변하는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그 쩔쩔매는 모습은 진실이라 봐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 경쟁체제에 익숙해진 상업화된 문화 내부의 시장에서, 너무 능숙하게, 마치 정치인처럼 미리 다 알고 준비했다는 듯이 척척 교과서적인 대답을 늘어놓는 작가들은, 사실 자신이 책임지기 어려운 말들을 턱턱 내뱉거나 오류와 경거망동을 일삼는 경우가 더러 있다.
김광진의 <편지>는 적어도 복잡하고 계산적인 모든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부분을 떠나 인간 내면의 속성, 자연과 일치된 감정 하나에 대한 순수함을 말하고 있다.
이 노래에는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가사는 김광진의 아내인 허승경이 썼고, 곡은 김광진이 만들기는 했지만, 이 가사의 주인공은 두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한 곡의 명곡은 그래서 위대하고 이상하다. 그 곡을 만든 사람이 이후의 시간이나 이후의 삶에 대해 모두 그 하나의 위에 올려두고 같이 생각할 필요 없이, 그 순간, 그 찰나의 아름다움에 대해 깊은 진심과 숭고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굳이 예를 들자면, 나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지 ‘모차르트’를 좋아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의 음악을 너무 좋아하고, 가수 ‘김현식’의 음악을 좋아하며, ‘유재하’와 ‘이문세’의 음악을 흥얼거리지만, 그들과 단 한 번도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다.
내가 좋아하는 모차르트는 나의 뇌에 머무는 이미지일 뿐,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과 ‘전태관’은 콘서트에서 연주하는 그들을 보았을 뿐이고, 라디오 방송에서 진행하는 목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그들의 음악 때문이다. ‘김현식’이나 ‘유재하’, 그룹 ‘들국화’ 멤버들과 그룹 ‘부활’의 ‘김태원’과 ‘이승철’, ‘신촌블루스’의 엄인호, 한영애, 이정선 등과 나의 최고 디바 ‘윤시내’, 최고의 로커 ‘신대철’, ‘임재범’, 시대의 천재 ‘신해철’, ‘서태지’와 <담다디>로 시작해 예술의 경지로 떠난 ‘이상은’, 낭만을 가르쳐 준 이장희, 한대수와 기타라는 악기의 변화무쌍함을 알게 해 준 김도균, 김종진, 김태원, 신대철을 비롯해 잉위 맘스틴, 게리 무어… 아!
이렇게 나가면 이건 뭐 끝도 없을 것 같은데, 아무튼 수많은 음악 예술인의 이미지는 그저 음악이 매개된 것이 전부지만, 마치 이전부터 그들을 잘 알고 있었고 친근했던 사이였던 것만 같다.
(#2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