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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면 날짜가 안 맞는데.."
남편과 함께 휴대폰 화면으로 일정표를 뚫어져라 보며 진지하다. 가장 친한 지인들과 몇 개월 전부터 여행 약속을 해놓았던 나는, 생각지 못한 시댁의 가족행사 등으로 인해 일정에 차질이 생겨 짜증이 일렁이고 있었다. 올해 봄부터 기대하고 있던 여행이었는데, 가족 행사를 중요시하는 남편이기에 섣불리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의 언행에서 불편한 감정이 새어 나왔다.
"아... 직장인 못해먹겠네."
주 6일제를 하는 맞벌이 가정에서 주말여행 일정을 잡는 것은 쉽지 않다. 겨우 시간을 맞추어도 예기치 못한 일은 빈번히 생기긴 마련이다.
"이렇게 일해도, 남는 게 없어.. 아... "
얼마 전 생활스포츠지도사 2급 자격증 시험에 합격했었다. 하지만 조절이 어려운 근무일정과 아이를 맡길 곳이 여의치 않다는 이유로 시험 연수를 받지 못해 자격증이 보류되었다. 여가 시간을 반납하고 준비한 시험이었기에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거기다 미리 예정해 두었던 여행 일정도 가족 행사로 인해 차질이 생기자 말 그대로 직장인의 현. 타(현실 자각 타임)가 밀려왔다.
남편: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건데?"
날짜를 두고 말이 오가다가 짜증 섞인 나의 언행이 씨가 되어 싸움이 시작됐다.
여행 일정 맞춰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왜 짜증을 내냐는 남편과,
예기치 못한 시댁 가족행사로 여행에 차질이 생겨 화가 난 나의 갈등이었다.
"내가 왜 화났는지 이해 못 해?!!"
서로를 향해 활활 타오르는 매서운 눈빛이 오가며 언쟁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7살 아들이 양팔을 만세 하는 자세로 우리 주변을 마구 뛰어다니는 게 아닌가.
속으론 '아이가 놀랐으면 어쩌지'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남편을 향해 희번덕하게 뜬 눈을 거두지 않았다.
그리곤 곧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와 ~~ 드디어 싸우는 거 본다!!!!!"
'잉? 이게 무슨 말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남편이 말을 한다.
부부싸움에 집중해야 하는데, 주변을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들 녀석 덕분인지 상황이 심각해지지 않는다.
몇 번의 다툼 아닌 다툼이 오가다 대화가 중단되었다. 남편이 쓰레기 버리는 핑계로 화를 식히러 집을 나선다.
아이가 내 앞으로 다가와 미소를 보인다.
"드디어 엄마 아빠 싸우는 거 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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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좀처럼 싸우지 않는 편이었다. 6년의 연애와 결혼 후 8년까지 총 14년 동안 싸운 횟수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이다. 좋게 말하자면 남편과 나 모두 평화주의자인 덕분이다.
하지만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남편과 싸우고 싶었다. 모든 것을 맞춰주겠다는 식의 태도가 내키지 않았다. 한 사람의 희생은 언젠가 결국 둘 다 불만족하게 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남편의 의견을 묻곤 했다.
나 : "여보 생각은 어때?
남편: "난 그냥 이래도 되고 저래도 돼. 다 괜찮아."
나: "......"
그렇게 어쩌다 보니 안 싸우게 되었다.
얼마 전 '싸움'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우리 부부가 싸우는 모습을 아이가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싸우는' 모습을 본 적도 없지만 '화해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남편과의 다툼 도중에 그런 생각들이 떠오르며 '차라리 잘됐다.'하는 마음이 들었다.
"oo아, 엄마 아빠 싸워서 놀라지 않았어?"
"놀랐지. 근데.. 드디어 싸우는 거 봤어!!"
"그렇지? 괜찮아. 엄마 아빠 곧 화해할 거야."
"응!"
아이는 여느 때처럼 나와 팽이 놀이를 하고 책을 읽고 양치를 마친 후 잠이 들었다. 아이를 재우고 남편과의 갈등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켜 다른 방으로 향했다. 그 사이 열린 문틈으로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복잡한 생각은 정리해야 잠이 드는 나와는 다르게 남편은 자신만의 심플한 시스템이 있는 모양이다.
여러모로 우리가 참 많이 다르네.
근데 뭐. 나쁘지 않아.
드디어 싸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