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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철 Feb 01. 2023

변론일기 #1 시작과 끝

#1 제주도 보이스피싱 사건

#1 제주도 보이스피싱 사건 - 시작과 끝


2019년 겨울, 주문한 적이 없는 전자제품를 구매했다는 문자로 시작된 마술같이 화려하고 영화같이 촘촘한 사기극을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님은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린 순간 계좌에 있던 돈은 모두 사라지고 난 후였다. 오랫동안 모신 노모가 돌아가신 후 장례를 치르며 받은 부의금을 모아 둔 돈이었다. 경찰관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신고를 접수해주었지만 돈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제주도에서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조직원은 재판에 넘겨졌지만 돈은 이미 모두 해외로 송금된 후였다. 그렇게 사건은 시작되어 버렸다.    


제주도로 가는 어느 하늘 위


해가 바뀌고 겨울이 지나갈 무렵, 법원에서 우편이 날라왔다. 할아버님이 돈을 송금한 계좌의 주인이 소송을 걸어온 것이었다. 경찰 신고로 계좌가 묶였기 때문에 이를 풀기 위한 소송을 제기한 것이었다. 변호사도 선임했고 소송비용을 부담하라는 청구도 함께였다.      


재작년 2월 사무실에서 처음 뵌 할아버님은 떠듬떠듬 그 날의 일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그 날의 슬픔, 허망함, 자괴감과 분노가 전해졌는데, 나도 마음이 울렁였다. 감정을 걷어내고 상황을 다시 구성해보니 상대방이 걸어 온 소송에서 이기는 것은 당연하고 도리어 상대방으로부터 돈을 받는 것이 법리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관계를 정리하고 관련된 사례와 법리 등을 설명드리고 사건을 정식으로 수임했다. 사건의 규모나 보수와 관계없이 의미가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일에 착수했다. 관련 형사기록을 등사해서 검토해보니 사건의 배경과 뒷면이 보였다. 상대방은 단순히 계좌 정보를 제공한 것이 아니었고 송금된 돈을 직접 인출해 전달까지 한 상황이었다. 다만 계좌가 정지되어 범죄라고 인식한 후 수사에 협조해 보이스피싱 조직원의 체포를 도왔던 터라 수사나 처분을 받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일반적으로 보이스피싱으로 송금된 돈을 인출하여 전달하거나 송금하는 이른바 전달책의 경우에도 상당히 중한 형사처벌을 받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보면, 상대방이 수사조차 받지 않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상대방의 행동과 흔적들을 꼼꼼히 모아내어, 상대방이 형사처분을 받았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상대방의 행동은 민사적으로는 불법한 행동으로 평가해야 하며 할아버님이 입은 피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상대방에게 할아버님이 입은 피해의 일부를 배상하라는 반소를 제기했다.   

   

2020년 봄에 시작된 재판은 두 해가 지나고 제주도를 수차례 오가고 나서야 끝이 났다. 법원은 반소 청구대로 상대방의 할아버님에 대한 피해 배상 책임을 인정했고, 지난 주 법원의 판단대로 할아버님의 계좌에는 피해의 일부가 입금되었다.      


돈이 입금된 후 할아버님은 지난 시간의 소회를 말씀하시며 몸과 마음이 괴로웠는데 이제는 몸도 마음도 많이 좋아졌다고, 모두 덕분이라며 그간 애써주어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할아버님의 몸과 마음이 회복된 것이 어찌 이 송사 때문만이었겠느냐마는, 그래도 정말 할아버님의 몸과 마음의 건강이 좋아지신 것으로 보여 참으로 좋았고, 지난 시간 쏟은 마음과 노력을 본인의 삶을 나아지게 한 것으로 귀하게 여겨주시니 감사했다. 이제 사건은 모두 끝이 났고 이렇게 나의 역할도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지난 시간의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들은 모두 털어내시고 몸도 마음도 건강히, 행복한 일상들로 채워나가시기를 두 손 모아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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