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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흥미진진한 독자 Apr 30. 2024

칭찬받고 싶은 비데 설치의 달인

6년 쓴 비데가 고장 났다. 화장실에 설치된 전자제품이다 보니 습기와 수분 때문에 자주 고장 나는 기계가 비데다. 방수제품이라고는 하지만 세월에는 장사 없다고 습기 방어에 실패해 마침내 고장 나고 말았다. 이번 제품은 6년을 꽉 채워 썼다. 그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해준 비데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재활용 분리수거장으로 보내주었다.

이제부터 남편의 쓸모가 증명되는 시간이다. 남편이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쓸모 중에 비데 설치 기술이 있다. 평소 소파와 혼연일체가 되거나 컴퓨터와 한 몸인 듯 살아가는 남편이지만 아~주 가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때가 있는데 오늘 그 미친 존재감을 뽐낼 기회가 온 것이다. 남편은 비데 탈부착, 필터 교체를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한없이 게으른 남편을 움직이게 하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돈 절약! 돈을 절약할 수 있다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자린고비 남편이다. 입은 쉬지 않고 투덜거리지만, 손과 발은 움직이고 있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결혼 후 이사만 6번. 2년 주기로 이사를 해보니 이삿짐센터에서 해주지 않는 게 바로 비데 설치였다. 비데를 떼어서 옮겨 주기는 하지만 설치는 해주지 않았다. 설치는 시간도 걸리고 고장이 날 수도 있으니, 전문가를 불러서 설치하라고 한다. 이사할 때마다 가정방문한 기사님들이 비데 설치 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봐왔고 이제는 스스로 설치할 수 있겠다고 남편이 선언한 것이다.



출장비 2만 5천 원을 아끼기 위한 도전은 힘겨웠다. 설명서가 있었지만 컴퓨터를 제외한 모든 기계에 똥손인 남편에게는 힘든 과정이었을 것이다. 반나절을 끙끙대며 설치한 비데에 물줄기가 나오지 않은 적도 있고, 깨진 작은 부품 하나를 사기 위해 부품값보다 더 비싼 배송료를 낸 적도 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남편은 비데 설치 기술자가 되었고 이제는 비데가 고장 나면 제품만 사서 스스로 뚝딱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이번에도 비데가 고장 나자 남편은 비데쇼핑을 시작했다. 남편은 한 푼이라도 아낄 수 있다면 모든 도전을 서슴없이 한다. 그래서 새 제품이 아닌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비데를 샀다. 혹시 썼던 것일지도 모르는 비데인데 중고로 사는 게 맞을까 싶었지만 사용하지 않은 비데라는 말을 믿고 구매했다. 남편은 기존 가격보다 5만 원 싸게 제품을 구입했다고 좋아한다.



제품마다 부품이 조금씩 다르니 설명서를 탐독하고 40분 만에 설치 완료 및 세팅까지 끝낸 남편이다. 점점 설치 속도가 빨라진다. 이제는 알바를 뛰어도 될 것 같은 기술자가 되었다. 궁즉변 변즉통(窮則變, 變則通)이라는 말이 있다. 궁핍한 살림살이(窮) 덕분에 남편의 게으른 성정에 변화(變)가 생겼고 한 푼이라도 아껴보려는 마음가짐이 한 가지 기술을 터득(通)하게 했다. 남편도 본인이 완성한 비데 작품에 만족하는 눈치다.


      < 비데 설치하기 위해 청소도 깔끔하게 한 남편 >


업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술을 활용한 것이다 보니 스스로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다. 아내의 칭찬도 받고 싶은지 비데에 앉아보고 사용해 보라며 강권한다. 자화자찬이 특기인 남편은 아마 며칠 더 자신의 공덕을 칭송하는 언행을 보일 것이다. 설치 완료 후 남편이 원하는 수준의 파이팅 넘치는 칭찬을 해주지 않자 마지막에는 비데를 설치하기 위해 아낀 7만 5천 원어치 칭찬을 해달라고 조른다. 칭찬 7만 5천 원어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남편의 말이 웃겨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비데를 설치해 출장비를 아낀 것보다 아내를 웃게 한 게 더 큰 수확이었을 것이다.  남편에게는 잘 웃어주지 않는 아내의 모나리자 같은 미소를 보았으니 말이다.



비록 격하게 칭찬해주지는 않았지만 비천하고 더러운 일이라 치부하지 않고 몇 푼이라도 아껴보기 위해 도전하는 남편의 자린고비 정신만은 칭찬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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