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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왕 May 18. 2023

신체포기 각서를 작성한 이유

이곳은 교도소인가 학교인가

고등학교 입학 첫날! 우리 학교는 입학식 첫날부터 밤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시켰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야자시간이 되자마자, 학생들 모두가 자연스럽게 '수학의 정석'이나 '우선순위 영단어'를 펴고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이 학교는 전통의 명문고답게 중학교 때 전교에서 최소 10등 안에 들던 친구들이 대거 입학한 곳이었다. 그래서 소위 범생들만 몰려있는 학교의 분위기상 '야자' 문화는 그저 당연한 것이었다.



여기는 수원 고등 교도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학교가 전통의 명문고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우리 학교는 입학을 할 때 학교-학생-학부모의 3자 간 동의하에 일명 '신체포기 각서'라는 것을 작성했다. 이 종이 쪼가리 따위가 수많은 명문대생을 배출시킨 근원으로 작용할 줄은 몰랐다. 사실 입학 당시만 해도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막상 학교를 들어가 보니 왜 이 각서를 작성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교 교실과 복도를 울리는 매타작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심한 경우 주먹질이나 싸데기를 떼리는 선생님들도 있었다. 게다가 학부모들은 자발적으로 체벌전용 떡메세트를 제작하여 교사들에게 제공했다. 나무위키에서 발췌한 글을 보면 그 당시 우리 학교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학생들은 학교의 명성에 혹해 각오하고 들어갔고
학부모들도 "애들 좀 때리면 어떠냐. 대학교만 잘 보내면 그만이지."라는 마인드라 오히려 학교를 지지하여 큰 문제는 없었다.

당시 학부모들의 학교에 대한 지지가 어느 정도 수준이었냐면,
학부모회를 중심으로 교육청의 『고등학교 체벌에 대한 상세 규정』에 칼같이 맞춰 나무로 몽둥이를 깎아 학교에 제공하였을 정도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학교의 특산품 '떡메'
넓은 노 형상인지라 눕혀서 맞으면 그냥저냥 버틸 만하지만,
흡연 등의 대역죄를 저질러 교사가 빡치기라도 하면, 이걸 세워서 타격하는데 영혼이 달아날 정도의 위력을 발휘한다.

체벌에 관해서는 뭐 그냥 엎어놓고 곤장 몇 대 치는 애교 수준부터 시작해 플라스틱 자를 활용한 손끝 치기, 회초리를 이용한 종아리 전·후 동시 가격, 고전적인 원산폭격, 손으로 귀를 잡고 팔꿈치를 땅에 대고 다리는 사물함에 올리는 사마귀 자세 등등 다종(多種)·다양한 기술들을 선보였다.

학교 주변 조용했던 주택가는 오밤중에 들리는 정겨운 떡메소리에 놀라고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으며, 주민들은 애들 좀 그만 패라며 신경질을 부리는 사례가 빈번했다.

출처 : 나무위키

체벌 전용 떡메세트



우리 학교는 선생님의 권위가 아주 강력했다. 성적이 떨어지거나, 수업이나 야자 시간에 졸거나, 잘못을 저지른 경우 가차 없이 '매 타작'과 같은 체벌이 가해졌다. 아니! 진짜 대놓고 잔 것도 아니고 그것도 야자 시간에 졸았다는 이유로 두들겨 맞아야 한다는 게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길게 늘어진 복도에는 언제나 쫙~쫙! 매 맞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한 학교의 풍경은 흡사 '교도소'를 연상케 했다. 학교 주변 담벼락은 가시덤불로 덮여있어서 담을 넘는 것이 불가능했고, 정문에도 늘 감시자가 있어서 쉬는 시간조차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규율도 굉장히 엄격했다. 두발 자유가 없어서 군대처럼 스포츠머리로 빡빡 밀었고, 바지통도 줄이지 못해서 늘 펑퍼짐하게 다녀야 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이런 현실을 빗대어 학교 이름을 앞에 붙이고 '00 교도소'라고 농담 삼아 얘기하고 다녔다. 훗날, 나는 군 입대 후 우리 학교의 유일한 혜택(?)을 톡톡히 보았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름 빡센 경험이 있어서 오히려 군대 생활이 굉장히 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내 성격상 억압되고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은 환경, 강제적이고 수동적으로 조성된 환경을 극도로 싫어한다. 불행하게도 우리 학교는 그런 곳이었고, 학교는 나와 소위 합이 맞지 않았다. 마치 교도소와 같은 학교의 엄숙한 분위기는 하루하루 내 숨통을 조여왔다. 나는 정말 진심으로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안양을 떠나서 이사 올 때만 해도 야심 찼던 포부와 달리 나는 수원에서도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서울촌놈의 하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나는 또다시 고등학교 입학 후 1년 내내 방황하기 시작했고 공부에도 흥미를 붙이지 못했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을 버텼는데..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이벤트가 찾아온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00 연예기획사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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