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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수진 Aug 08. 2022

메가 컬렉터의 사적인 전시 2

혐오로부터 멀어지기, 피노 컬렉션

푼타 델라 도가나에서의 브루스 나우먼 전시와 함께 지금 베네치아에서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피노 회장의 컬렉션, 마를렌 뒤마의 전시 "open-end"로 가보자.

 

나우먼의 영상과 퍼포먼스를 사용한 전시와는 달리 뒤마의 전시는 (비디오 아트도 있었지만 손에 꼽을 정도) 회화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피노 컬렉션이라는 이름을 달고 전시를 전개했지만 다른 갤러리나 개인 소장 작도 함께 전시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나우먼의 전시와 마찬가지로 모든 작품이 도록에 설명되어 있었다.


남아공 출신의, 현재는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마를렌 뒤마 Marlene Dumas사랑, 죽음, 성, 인종, 죄, 폭력 등에 관한 고찰사회 정치적인 시각으로 캔버스에 클로즈업 상태로 담아 풀어내고 있다. 공간감이 먼 풍경화가 아닌 인간의 감정들이 잘 드러나는 가까운 시선으로 관객들을 이끈다.


The White Disease, 1985 / Betrayal, 1994

작품 The White Disease는 피부과에서 일하는 친구를 찍은 사진에 기초를 두고 작업을 했지만 제목과 함께 은유적인 작품으로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색과 형체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게 표현된 그림 속 인물은 어떠한 좋지 않은 상태에 놓인 것이 틀림없어 보이지만 관람객은 그것이 제목에서 말하는 disease(질병) 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도록의 해석이 이 작품을 더 흥미롭게 한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에서 인종차별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화두가 되고 있는 주제이며 백인들에게는 사라지지 않을 집단적 과실이 되어버린 현시대를 나타내었다고. 그래서 제목이 직역하여 하얀 질병이었던 것.

과감한 주제를 시적인 방식으로 풀어버린 작가의 의도 덕분에 작품의 의미가 한층 더 깊어졌다.  


바로 이어서 The White Disease와 같은 전시실에 있었던 Betrayal 또한 흥미롭다.

뒤마의 이 작품으로 인해 몰랐던 남아공의 근대 역사를 조금 접할 수 있었는데 이 작품엔 작가가 남아공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시절의 부끄러운 과거인 아파르트헤이트의 역사가 담겨있다. 백인 정권의 지휘 아래 유색인종을 인종별, 부족별로 카테고리를 나누어 결과적으로는 혐오를 조장한 정책으로 작가는 그 카테고리에 관련된 사람들을 나타낸 초상화 모음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영화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도 보이는데 영화 잉마르 베르만의 처녀의 샘에서 영감을 받아 개구리를 그림의 테마와 궤를 같이하는 부정적인 대상으로 배치시켰다.


인종차별은 이 세상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당하고 할 수도 있는 우리 가까이에 존재하는 것이면서 수면 위로 올리기엔 민감하고 누구 하나는 불편해지는 소재이기 때문에 다수에게 내보일 땐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데 뒤마는 자신의 의견을 자전적인 시선으로 주저 없이 내보이고 있었다.

Dora Maar (The Woman Who saw Picasso cry), 2008 / Teeth, 2018 / Mamma Roma, 2012

앞서 언급했듯 뒤마는 인물을 클로즈업한 형태를 많이 작업했는데 사방이 흰 색인 전시장 안에서 그리 크지 않은 작품들이 내뿜는 감정들을 보고 있노라면 캔버스 외의 공간을 상상하게 하는 강한 자극을 느낀다.


첫 번째 작품의 모델이 된 도라 마르는 실제 피카소의 뮤즈이자 연인으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울고 있는 피카소를 바라보는 여인이다. 피카소의 유명한 작품 우는 여자의 모델이 이 그림의 주인공인 도라 마르였지만 그와 반대로 뒤마의 도라 마르는 제목대로 우는 피카소를 바라보고 있다. 원작에서는 울고 있던 도라 마르가 지금은 우는 피카소를, 더 나아가 관객들을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큐비즘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피카소의 우는 여인은 이렇게 뒤마의 손 끝에서 전환이 되었다. 대상의 전환이 이렇게나 흥미롭다.


사랑스럽고 에로틱한 의미의 입술에서 벗어나 다른 형태의 입술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작가의 공격적인 치아라는 작품을 건너 파졸리니 감독의 맘마 로마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 Mamma Roma로 시선을 옮겨보자.

30x24cm의 작지만 영화의 모든 서사와 감정이 다 들어가 있는 작품에 한참이나 발길을 멈추어 있었다. 영화를 알지 못한다 해도 이 작품이 내뿜는 에너지는 공간을 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Great Men, 2014~

뒤마는 앨런 튜링으로 시작해 이성애자가 아닌 위인들의 초상화를 그들의 프로필과 그들이 남긴 말을 담은 작업을 2014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 오고 있다. 아쉽게도 전체적인 사진을 찍지 않고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사진만 찍었지만 큰 전시장의 한 벽이 서른 명이 훌쩍 넘는 아티스트들의 초상화로 채워져 있었다.

베이컨과 튜링뿐 아니라 테네시 윌리엄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차이콥스키 등 그들의 정체성으로 인해 시대로부터 외면당하거나 평가절하된, 그렇지만 세상이 외면할 수 없는 위인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게끔 그들의 업적을 함께 적어 배치해 두었다.

멀리서 보면 단순히 남자들의 초상화로 알 수 있지만 의도를 알기 위해 가까이서 그들의 프로필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하나의 공통점을 알게 되고 그들이 남긴 수많은 업적들에 있어 정체성이란 것은 단지 어떠한 하나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한 말이 참 깊게 남는다.

"예술은 우리를 더 볼 수 있게 도와주려 존재하는 것이지 덜 보게끔 존재하지 않는다. 법은 우리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려 존재하는 것이지 덜 사랑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법은 우리를 혐오로부터 보호해야만 하며 사랑으로부터 보호해서는 안 된다."

Death by association, 2002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르겠는 이 인물은 잠을 자는 것일까 죽은 것일까. 아무래도 후자 같다.

21세기로 들어오면서 뒤마는 죽음을 주제로 다루기 시작했고 그중에서도 전쟁으로 아군 사격을 당하거나 의심을 당해 희생당한 젊은이들에게 포커스를 맞춘다.

이 그림은 다른 그림들과 함께 2002년 안트베르펜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처음 선을 보였는데 전시회의 주제는 폭력 사건으로 죽음을 맞이한 팔레스타인 청년들이었다고 한다. 위의 그림은 신문에서 뒤마가 죽은 청년의 가족들이 고인 앞에서 코란의 구절을 읽어주는 사진을 본 후 그것을 기초로 하여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이 청년의 희생은 수많은 고전 미술의 희생들과는 다른 희생을 보여주고 있다. 성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금과 화려한 색들로 구성된 예수의 희생과 달리 차갑다 못해 푸른색으로 덮여있다. 그리고 청년의 죽음은 세로로 십자가에 매달려 많은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예수의 희생과는 다르게 가로로 누워 동적인 자세로 혼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해 보이고 있다. 팔다리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억압된 무언가로부터 당한 희생을 연상케도 한다.

21세기의 희생은 몇백 년 전의 그것과는 다른 성격의 희생으로 미술관에서 우리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씁쓸하지만 피할 수 없는, 지구 어느 편에서는 실제로 일어났던 그리고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


뒤마는 화려한 색이나 수려한 회화 테크닉을 쓰고 있지 않다. 거칠고 속도가 느껴지는 붓의 움직임과 때론 차가울 정도로 무관심하게 느껴지는 객관적 시선을 담은 색들은 지금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불편할 수도 있는 주제들이지만 (글에서 다루진 않았지만 적나라한 성에 관한 이야기들도 있었다) 이 주제들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 일상에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인간 그 자체를 나타내고 있다.

때론 애써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 이야기들을 뒤마를 통해 다시 한번 머릿속에 상기시켜 본다.




https://brunch.co.kr/@1be5d3bf285a4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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