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연휴 마지막 날의 계획은 친한 선생님 K, L과 전시회를 가는 것이었다. 근무하는 곳도 사는 곳도 다르지만 1년에 한두 번은 꼭 만나는 사이. 나는 K가 미리 사둔 티켓으로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 중인 베르나르 뷔페의 작품을 감상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 한편으로는, 4년 전에 이들과 같은 장소에서 만난 날 경험했던 일이 떠올라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4년 전에도 K는 L과 나에게 프랑스 화가의 전시회 티켓을 구매했다며 함께 보러 가자고 했다. 화가의 이름은 ‘툴루즈 로트렉’,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접한 화가들의 이름만 어느 정도 알고 있을 뿐이었던 내게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래도 전시회 감상은 좋으니까, 무엇보다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좋으니까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전시회장은 평일 오전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남부 프랑스 귀족 집안의 화가 로트렉, 어릴 때 당한 사고로 하반신의 성장이 멈췄으나,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으로 그림을 공부한 사람. 귀족들의 위선을 꼬집으며 파리 유흥업소의 무용수를 힘찬 스케치와 강렬한 색상으로 담아낸 사람. 나는 도슨트의 생생한 설명과 함께 로트렉이 그린 파리의 공연 포스터를 감상하며 계속해서 다음 전시장으로 이동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을 법한 그날의 전시회가 전혀 다르게 다가온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도슨트의 설명이 거의 끝나갈 무렵 도착한 전시실에서 그림 한 점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저녁 만찬 자리에서 테이블을 두고 나란히 앉은 남자와 여자, 여자는 그 옆에 점잖게 앉아 있는 다른 남자의 시선은 의식하지도 않는 듯 남자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를 하고 있다. 다른 이들에게는 수많은 로트렉 작품 중의 하나로 보였을 그 그림은, 바로 내 어린 시절 우리 집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채 붙어있던 것이었다. 작품의 크기까지도 같았다. 그래서 그 순간 나는, 그림이 붙어 있었던 30년 전의 우리 집과, 9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셨다. 하지만 전공과 상관없는 사무직을 직업으로 택하셨으니, 평소 마음껏 그림을 그리시거나, 잡지에 나오는 집처럼 집안 곳곳에 여백의 미를 강조하며 툭툭 그림을 전시하실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마도 해외 출장에서 구해 오셨을 포스터를 패널로 만드신 후, 네 식구가 복닥거리는 집의 거실 한쪽 벽에 욱여넣듯 붙이셨다. 애초에 그림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여유 벽면이 아니었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패널의 바로 앞을 식탁과 의자가 가로막았다.
나는 그 그림이 불편했다. 우리 집에 놀러 오던 친구들마다, 그림 속 남녀가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 야하다고 비명을 지르며 웃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얼굴 만한 크기의 키스하는 남녀 그림이 식탁 옆에 붙어있는 집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가뜩이나 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던 소심한 나는, 사춘기 소녀들이 보기에 마냥 도발적으로 느껴졌던 그림을 벽면이 꽉 차게 붙여둔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20여 년을 보낸 집에서 이사를 할 때쯤에야 그 패널은 지하실로 옮겨졌고, 내 기억 속에서 잊혔다.
2020년 그날 예술의 전당에 가기 전까지도 나는 로트렉을 몰랐던, 돌아가신 아버지의 취향도 마음도 읽지 못했던 무심한 딸이었다. 그날 전시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그 작품을 만날 줄 몰랐으니, 내 눈에 불쑥 나타난 장면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만난 것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다. 정현종 시인이 ‘사람이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것, 그 사람의 일생이 온다는 것'이라고 했듯, 그날 만난 로트렉의 그림은 내게, 아버지와, 아버지의 일생과, 나의 어린 시절을 소환했다. 애써 노력해도 꿈에서조차 잘 만나지 못했던 아버지를, 그날 나는 로트렉의 그림으로 만났다.
며칠 후면 아버지의 기일이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아직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았더라면 하는 후회도 한다. 베르나르 뷔페의 전시회에선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 4년 전 그날처럼, 어디서든 불쑥, 아버지가 나타나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