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사는 붉은 다람쥐와 회색 다람쥐의 생존 경쟁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는가? 미국 오하이오주 공장에서 근무하는 근로자들의 주인 의식에 대해서는?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라고 묻는다면, 다행이다. 당신은, 어쩌면 당신 인생과는 무관할 법한 온갖 지식을 마구 던지는 <수능 영어영역 지문>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은 아니란 뜻이므로.
영어영역 지문이 아우르는 분야는 참으로 다양하다. 과학, 경제, 역사, 예술, 철학까지! 학생들의 지식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한 출제자의 고뇌가 느껴진다. 문제는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학생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입학하자마자 대입을 고민해야 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심지어 중학교 때에 비해 난이도가 훌쩍 높아진 영어 지문을 읽는 것도 화가 나는 판에, 다람쥐라고? 오하이오라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Who cares!!
이 상황이 교사는 곤란하기 짝이 없다. 정성껏 준비한 학습지를 꼭 끌어안고 교실에 들어섰을 뿐인데 아이들은 이미 화가 나 있으니 말이다. 학교는 학생에게 깊은 사유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나, 학생들은 그보다 즉각적인 즐거움이 넘치는 유튜브 쇼츠 세상을 이미 경험했다. 그러니 교사의 고민은 깊어진다. 지나치게 고차원적인 수업 설명으로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게 해서도, 너무 유치해서 비웃음을 유발해도 안되는, 중용의 미덕을 적용해야 할 때다.
그래서 다시 붉은 다람쥐와 회색 다람쥐 이야기로 돌아가보면...오래 전 영국에는 붉은 다람쥐들이 행복하게 살았더랬다. 어느 날 미국에서 회색 다람쥐들이 오기 전까지는. 덜 익은 녹색 도토리를 먹고도 쌩쌩했던 회색 다람쥐와는 달리, 다 익은 도토리만 소화시킬 수 있었던 붉은 다람쥐는, 회색 다람쥐가 먹어치워서 싹 없어진 도토리를 영문도 모른 채 찾아 헤매다 한 입도 못 먹고 굶어 죽어갔다는 슬픈 이야기. (지문의 주제는, ‘외래종의 침입으로 인한 토착종의 멸종’이다!)
이 내용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처음에 나는 어리석게도, 진지했다. 마침 주말에 TV 시사프로그램에서, 말레이시아에 나타난 외래종 물고기 ‘플레코’가 토종 어류를 다 잡아먹었다는 영상을 본 참이었다. 어부들이 팔뚝만한 플레코를 잡아 흔들며 ‘이건 맛도 없어요!’라며 소리치던 장면도 강하게 뇌리에 남았다. 맛도 없다니, 이건 너무 속상한 일 아닌가. 하여, 수업 시간에 이 사례를 소개하며 매운탕까지 예로 들었는데, 웬걸, 교실엔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어색함을 반전시키고자 급히 덧붙인 황소개구리 이야기로 교실은 더 얼어붙었다.
하긴, 매운탕과 개구리가 그들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행히 나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아니, 네 학급의 수업이 더 남아 있었다. 다시금 되새길 교훈도 있었다. 수업 내용이 무엇이든 보편성을 생각하자는 것. 학생들은 그 내용이 자신에게 유의미할 때 마음을 연다는 것. 보편성! 유의미성! 말하자면 다람쥐는 내가 될 수 있고, 매운탕은 삼겹살이 될 수 있다는 논리!
수업 내용은 전면 수정되었다. 회색 다람쥐는 불판에 올린 삼겹살을 핏기가 가시기도 전에 먹어 치우는 내 친구이다. 나는, 내 친구 회색 다람쥐가 불판을 초토화시킨 탓에 삼겹살 냄새만 맡다 힘없이 쓰러져가는 연약한 위장의 소유자 붉은 다람쥐다. 당신은 붉은 다람쥐인가 회색 다람쥐인가? 이 억울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전략은 무엇인가? 그들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둘 사이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어떤 자세가 필요한가?
어떤 설명에도 심드렁하던 학생들의 눈이 번쩍 떠지며 치열한 토론이 이어졌다. 적나라한 비유에 갑자기 들끓은 수업 분위기가 당황스러웠지만 어쨌든 수업은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학생 개인의 내적 동기를 유발할 서사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는 것. 어째 이번은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지만, 보편성과 유의미성을 항상 염두에 두자는 것.
그나저나 역시 아이들에게 매운탕보다는 고기인건가. 대체로 학생들에게 고기는 늘 옳았다. 이건 지난 20여년 간 급식실에서 학생들의 식판을 관찰한 유의미한 통계다. 채식주의자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