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 빨리 읽기와 다시 읽기 사이에서
발단은 딸아이의 서평이었다. 얼마 전 읽은 책에 재미있는 부분이 있었다고 했다. ‘자기가 쓴 책을 읽는 느낌은 두세 살짜리 아이가 자신이 싼 똥을 내려다보며 뿌듯해하는 마음에 가깝다’는 것. 아이는 그 표현이 너무 웃기지 않냐며 깔깔 웃었다. 뜨끔했다. 안 그래도 요즘 인터넷에 올린 내 글을 읽고 또 읽으며 흐뭇해하던 모습을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편, 내 글이 인터넷의 망망대해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멸치 한 마리 같다는 생각도 하던 참이었다.
도대체 그런 책을 누가 썼는지 궁금했다. 이것은 칭찬인가 욕인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맥락이라도 파악해 보고자 아이에게 책 제목을 물었다. 세상에나, 아이가 읽은 책은 문유석의 ‘쾌락독서’, 심지어 내가 5년 전에 사서 읽고 서재에 꽂아둔 책이었다. 분명히 유쾌하게 읽었던 책이었던 것 같은데 그 구절이 전혀 기억조차 나지 않다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내 독서 속도보다 새 책이 나오는 속도가 훨씬 빠르니, 신간만 읽어도 시간은 늘 부족했다. 게다가 내 지적 허영심은 하늘을 찌른다. 쏟아져 나온 책을 서둘러 읽고 남들에게 ‘나 그 책 읽었어!’ 하기도 바빴다. 다 읽은 책 제목을 저장하면 ‘귀염뽀짝’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독서기록 앱도 이런 나를 더 부추겼다. 독서란 내게, 일종의 도장(道場) 깨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딸아이가 말한 그 구절이 몹시 신경이 쓰였다. 아마도 자격지심일 것이다. 내가 요즘 신나게 쓰고 있는 글은 똥이란 말인가 된장이란 말인가. 글을 계속 쓰라는 말인가 말라는 말인가. 확인이 필요했다. 아이에게 책의 어느 부분에서 읽었냐고 묻기엔 왠지 자존심도 상했다. 그러니 그 책을 다시 읽어보며 황금 같은 주말을 보낼 수밖에. 그래서, 어쩐지 손해 보는 듯한 기분으로 책의 맨 앞장을 펼쳤다.
‘책 한 권을 쓰기 시작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로 시작한 첫 문장에 마음이 출렁였다. ‘몸을 누일 방구석에 쌓아둔 취향 맞는 책 몇 권만 있어도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진다’는 부분은 또 어떤가.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그’ 부분에서, 저자는 완성도에 상관없이 자신의 글을 좋아한다는 점을 고백했다. 읽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가 언급한 ‘똥’, 즉 자신이 쓴 책은, 더럽지도 혐오스럽지도 않은 자랑스러운 산출물이었던 것이다. 나 또한, 내가 쓴 글을 아끼고 계속 바라볼 든든한 이유가 생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시 읽기’를 하자, 이전에 표시한 부분이 아닌 곳에서 새로운 울림을 주는 문장이 속속 등장했다. 친숙하면서도 과거와는 다른 색감의 문장이 내게 각인되는, 내 몸에 나이테가 새겨지는 느낌이랄까. 그제야,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사주신 창비 아동문고 책 속 문장을 아껴가며 읽고 또 읽었던, 도장(圖章)을 찍듯 마음속에 문장을 꼭꼭 눌러 담았던 지난 기억이 되살아났다. 참 오랜만이었다. 수십 년 만에 되찾은 ‘다시 읽기’의 맛이었다.
백영옥 작가는 10년마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며 달라진 밑줄을 확인한다고 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신이 얼마나 변화되었는지 살펴보기 위함이라고. 나 또한 딸아이의 말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펼친 책 덕분에 ‘다시 읽기’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이제라도 깨달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러고 나니, 그동안 한쪽으로 치우쳤던 내 독서 습관도 점차 변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도장(道場) 깨기’식 독서법은 포기할 수가 없다. 새로 나온 책을 쭉쭉 읽어 나갈 때마다 드는, 서서히 똑똑해지고 있는 듯한 간질간질한 기분을 어찌 놓아줄 수 있겠는가. 다만 나는 이번에 경험한 ‘다시 읽기’, 즉 ‘도장(圖章) 새기기’ 독서법 또한 곁들이고 싶어 졌다는 것이다. 마음에 와닿는 귀한 문장을 훨훨 날려 보내지 않은 채 차곡차곡 담아두고, 이따금 생각이 날 때마다 찾아 읽으며 예전의 감흥을 되새기는 것의 행복을 알았기 때문이다. 두 독서법의 결합, 생각만 해도 설렌다. 그래서, 앞으로의 책 읽기 생활은 더 즐거워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참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