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시크릿, 영국 왕실 출신의 고혹적인 여인일 듯한 그녀의 비밀이라니. 신비스러운 이름의 이 브랜드를 처음 알게 된 건 대학 시절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마치고 온 선배 오빠 J, 그리고 그와 막역한 사이인 K언니와 함께 한 자리에서였다. 해외 직구는 생각도 못하던 그 시절 소문난 멋쟁이였던 K는 당시 미국에 있던 J에게 귀국 시 빅토리아 시크릿의 속옷을 사다 달라는 상당히 난감한 부탁을 했고, 착실하고 믿음직스러운 공대생 J는 K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차분히 미국 쇼핑몰의 아이템을 클릭하여 자신의 기숙사로 속옷을 배송시켰다. 문제는 그때부터. 한 번 고객은 영원한 고객임을 잊지 않은 빅토리아 시크릿은 J가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수시로 카탈로그를 배송했으니, 본의 아니게 J는 미국 대학 기숙사로 여자 속옷 카탈로그를 대놓고 받아보는 변태 동양 남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던 것! 난감한 시간을 꿋꿋이 이겨내고 한국에 돌아온 J가 K에게 전달해 준 팬티의 뒷부분에는 딸랑이 방울이 달려 있었고, 이를 함께 펼쳐본 우리는 깔깔 웃으며 이 팬티는 헐렁한 치마 속에 입으면 분명히 소리가 날 테니 반드시 꼭 끼는 바지를 입을 때만 착용해야 할 것 같다는 농담을 주고 받았다.
그로부터 무려 20여 년이 흐른 이번 겨울, 나는 코로나 이후 5년 만에 해외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짐을 더미더미 싸는 가족 여행이 아닌 싱글 친구들과의 첫 여행이니 얼마나 흥분되었겠는가? 게다가 그곳에서 운명처럼 마주친 빅토리아 시크릿 매장! 드디어 내가 왔다! 우리 나라 속옷 브랜드보다 실제 브라 사이즈가 더 과장되게 표기되어 있어서 구매 시 만족감을 배가시킨다는 친구의 설명에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과연 그곳은 소문대로 속옷 맛집이었다. 매장 직원은 짧지만 정교하게 표현하고자 애쓴 내 영어 문장에 자본주의적 미소로 응대하면서, 피팅룸에 따라 들어와 섬세한 동작으로 내 몸에 딱 맞는 사이즈를 추천해 주었다. 신중하게 고르고 고른 두 개의 브라, 역시 한국보다 한 단계 큰 사이즈가 적힌 태그를 보자 이것은 반드시 사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내가 언제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그 사이즈가 적힌 브라를 입어 보겠는가? 역시 쇼핑은 자기 만족인 것이다. 게다가 친절한 싱가폴은 100달러 이상 구매 시 공항에서 세금 환급도 해 준다며? 나는 107달러를 소비했으니 이보다 더 현명한 소비자일 수 없었다. 싱가폴에 살고 있는 똑똑한 내 친구는, 출국 시 공항에서 세금 환급 키오스크에 여권만 스캔하면, 구입한 물품을 직원들이 굳이 살펴보지도 않으니 참 간단하더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여행 일정을 야무지게 마무리한 나는 출국일 공항에 도착하여, 셀프 체크인과 수하물 부치기를 순조롭게 끝낸 후 가벼운 마음으로 세금 환급 키오스크로 향했다. 여권을 스캔하니 영수증 비스무리한 것이 출력되었는데, 어라? 해당 종이를 여권과 함께 데스크 직원에게 제시하라는 말이 써 있지 않은가. 그냥 가는 게 아니었어? 그제서야 보이는 심드렁한 표정의 남자 직원에게 여권과 종이를 내미니, 그는 사온 물건을 함께 보여달란다. 이런, 친구가 해준 말과 다르잖아? 당황한 나는 직원에게 말했다. ‘이미 내 짐은 수하물로 부쳤는데?’ 직원은 말한다. ‘소용없어. 여기 써 있잖아. 물건을 보여주지 않으면 세금을 환급해줄 수 없어!’ 심장이 뛰기 시작하며 나는 매달려 본다. ‘여기 영수증이 있잖아. 나는 브라 두 장만 샀는데 너는 그걸 굳이 봐야겠어?’ 직원은 단호하다. ‘당연하지. 나는 봐야겠어! 봐야만 해!’
머릿속에 비상등이 켜졌다. 비행기를 놓치더라도 어떻게든 세금 환급을 받고 말겠다! 즉시 항공사 카운터로 돌진하여 상황을 설명하자 직원은 아랫층의 안내 데스크로 가라고 하고, 데스크로 날아간 나는 그곳 직원에게 다시 내 안타까운 상황을 늘어놓았다. ‘내 브라가...’ 설명을 들은 직원은 천천히 나의 인적사항을 입력한 후 목에 진지한 카드 목걸이를 걸어주며 입국장 입구로 나를 보냈고, 입국장을 거슬러 들어간 나는 분실물 센터의 직원에게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그곳 직원은 소파에 앉아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고, 약 30분 간의 지난한 기다림 끝에 결국 나는 수하물을 찾고 말았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그놈의 빅토리아 시크릿 브라를 쇼핑백에 넣어 세금 환급 직원에게 내미니, 그는 내용물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평온하게 말했다. ‘그래, 갖고 왔구나. 알겠어. 이제 여기에 사인해.’
이 모든 난리 버거지가 끝난 후 내가 받게 될 환급액을 생각해 보았다. 107달러의 7프로, 우리 돈으로 7400원이었다. 하...이 돈을 받기 위해 나는 그렇게 불살랐던가. 어쩌겠는가. 앞으로 브라를 집어들 때마다 세관 직원에게 매몰차게 거부당하고 7400원도 챙기지 못한 나를 자책하고 싶지는 않았으며, 덕분에 나는 더 특별하고 소중한 나만의 빅토리아 시크릿 브라를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에게 너는 그냥 브라가 아닌 그 무엇,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
(2024.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