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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하 Apr 29. 2024

가리가리 불가리 이야기-part1

ft. 눈물의 여왕

 평소 TV를 거의 보지 않는 내가 요즘 주말마다 챙겨보는 드라마가 있다. 이름하여 ‘눈물의 여왕.’ 최근 사유하는 인간다운 어휘 사용에 꽂힌 내겐 지나치게 직관적인 제목이다. 줄거리는 어떤가. 빼어난 미모를 지녔으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재벌 3세 여자, 그리고 평범한 집안 출신에 남다른 총명함, 뛰어난 인품과 외모로 그녀와 결혼한 남자의 이야기. K-드라마를 줄기차게 봐온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후의 뻔한 결말을 줄줄 읊을 법한 이 드라마를 내가 굳이 시간을 내서 보는 이유는 바로 하나, 등장하는 배우들의 손에서, 귀에서, 목에서 수시로 번쩍이는 주얼리를 감상하기 위해서다. 브랜드 이름은 바로, 불가리.  

    

  불가리라는 브랜드를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주얼리 쪽에 관심이 없었다. 백화점은 결혼 이후 발을 끊은 지 오래였고 내 미용 아이템은 옷에 국한되어 있었으니, 주얼리라면 기껏해야 터미널 지하상가에서 맘 편히 고른 귀걸이, 기념일에 남편에게서 받은 10만원 내외의 악세사리 몇 개가 전부였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화창한 주말, 중학생이 된 딸이 밑도 끝도 없이 내게 말대답을 따박따박 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시비를 위한 시비, 아무말 대잔치였다. 드디어 사춘기가 시작된 것일까? 나 또한 한주 간 누적된 피로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으니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럴 때는 애랑 대적하지 말고 일단 자리를 피해.’라던 육아 선배의 조언이 떠올라 바로 집을 뛰쳐나왔다. 어디로 가지? 이럴 때 어떤 이들은 소위 ‘금융 치료’란 걸 한다던데? 그렇다. 드디어 나에게도 백화점에 갈 명분이 생긴 것이다.      


  아마도 내가 집 근처에서 파워워킹이나 하며 화를 삭일 거라 짐작하고 뒤따라 나온 남편은, 무작정 지하철을 타고서 백화점까지 돌진하는 내 모습에 겁을 먹은 듯했다. ‘멈추지 않겠다!’ 씩씩대며 백화점에 들어선 나는 호기롭게 ‘해외 유명 브랜드’라고 안내된 2층으로 들어섰다. 매장마다 있는 유리 벽이 나를 막아서는 것 같았지만 위축되지 않았다. 나는 화가 나 있었으니까. 코로나 이후로 입장 대기 줄도 길어졌다지만 까짓것 기다리면 될 것 아닌가. 입구에 아이패드를 든 남자 직원이 있는 매장도, 키오스크 스탠드가 있는 매장도 상관 없었다. 아무려면 어때? 그래서, 눈에 보이는 매장 각각에 내 번호를 다 입력했다.     


  주변을 몇 바퀴 천천히 돌다보니 입장 알림이 하나 둘 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브랜드 중 처음 나를 불러준 매장이 바로, 불가리였다. 처.음. 그렇다. 사춘기 딸 때문에 한껏 쭈글거렸던, 그저 하나의 몸짓이었던 나는, 불가리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하나의 꽃, 의미가 된 것이다. ‘좀 차려입고 올 걸 그랬나...’ 잠시 후회했지만, 이내 움츠린 어깨를 꼿꼿이 펴고 매장에 들어섰다. 환한 미소와 정중한 태도로 남편과 나를 맞이하며 진열장 앞 의자로 안내하는 직원의 응대에 황송한 마음마저 들었다. 이게 바로 환대라는 것이군. 나도 똑같이, 꽤 자연스러운 태도로, 천천히 목걸이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 혼자 연기를 하면 뭐 하나? 문제가 있었다. 너무 순수한 남편을 데리고 온 것. 심지어 그 남편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키지도 않았다. 아 그건 물론 나도 그랬지만. 그렇다. 그날 우리의 행보는 너무 즉흥적이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가격대의 주얼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놀라운데, 그걸 진짜 살 듯이 무방비로 대차게 매장 안으로 걸어들어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직원이 소위 ‘입문템’이라며 소개해주는 목걸이를 차분히 착용해 보고 있는데, 나란히 앉아 있는 남편의 콧바람 소리가 씩씩대는 기관차 소리만큼 크게 느껴지는 거다. 그의 눈동자는 또 어떤가. 쿵쾅쿵쾅. 동.공.지.진. 정말 동공에서 지진이 일어날 수도 있겠구나. 누가 제일 처음 만들었는지 몰라도 그토록 적확한 표현일 수가 없었다.     

  

  결국, 직원과 마주 앉아 유려한 문장의 향연으로 제품 상담 놀이라도 해 보려던 나의 계획은, 남편의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던 나의 삼단 조합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더 둘러보고 올게요.’라는, 나도 알고 너도 아는 너절한 변명으로 쭈뼛거리며 서둘러 매장에서 후퇴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한 번 꽂힌 건 어떻게든 하고야 만다. 이대로는 그날 일어난 일의 시발점인 사춘기 딸도, 매장에서 뛰는 심장을 부여잡기만 한 남편도 다 미워지고 말 것이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다음 단계의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기다려라, 불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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