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방식
박찬욱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멜로다. 전작들을 곱씹을수록 박찬욱은 끊임없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구나, 싶다. 다만 이야기의 상황과 배경이 그리고 그 대상이 너무 특수해서 멜로처럼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를테면 누나의 신장을 찾아야 하고, 스스로 사이보그라고 믿으며, 사랑하는 그녀가 자신도 뱀파이어가 되겠다고 한다. 스토리는 제각각이지만 박찬욱이 생각하는 사랑은 한 가지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는 것, 이런 사랑의 방식 때문에 사건은 벌어지고 갈등이 찾아온다. 그리고 관객은 여러 가지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그 잔혹함과 현란함에 시선을 빼앗기고 이것이 사랑이야기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헤어질 결심>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에는 이전과 같은 잔인하고 자극적인 요소가 거의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박찬욱은 칸에서 ‘왜 저에게는 폭력과 섹스가 없는 이유를 묻는가’ 의아해했지만 그 이유를 본인만 모르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에게 새로운 시도였을 것이다. 상황도 배경도 대상도 이전보다는 보편적이라는 점이 오히려 그렇다. 주인공이 형사와 피의자라는 관계도 특수한 것 같지만 결국 클리셰에 가깝다. 여러 면에서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의 완전한 민낯이 될 수도 있었다.
-불륜
영화를 보기 전에 ‘<헤어질 결심>은 불륜 미화 영화’라는 논란을 먼저 보았다. 사전에 내용을 알지 못했으므로 막연하게 감독이 주인공들의 사랑을 절절하게 그려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불륜은 극 중 설정일 뿐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서래의 이 대사가 그 답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의도를 가지고 그런 척을 할 수는 있겠지만 진실한 감정은 통제할 수 없다.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타이밍은 어긋나고 비극이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제목이 사랑할 결심이 아닌 것이다. 해준의 아내인 정안 역시 외도로 인한 피해자가 아니다. 그녀 역시 헤어질 결심을 하고 이행하는 주체적인 인물이다. 10시 10분에 멈춰버린 시계는 같은 숫자이지만 다른 방향을 보고 있고 마주칠 수 없는 사람들, 혹은 갈림길 앞에 선 사람의 은유다.
-휴대폰
첫 취조에서 서래는 ‘말씀’이 아닌 ‘사진’을 선택한다. <헤어질 결심>은 행동으로 감정을 전하는 영화다. 말을 할 때는 휴대폰을 거친다. 해준과 서래의 대화는 번역기를 거쳐 전달되고 문자메시지로 소통하며 진심은 녹음된다. 휴대폰은 그 자체로 범죄의 핵심 증거면서 극복하기 어려운 갈등의 원인이 되며 종국에는 나 자신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휴대폰은 두 사람의 마음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휴대폰을 가져가라는 말과 휴대폰을 바다에 버리라는 말은 헤어지자는 뜻이 될 수도 있고 사랑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너무나 고전적인 느낌의 영화에서 최신 기기가 손편지를 대신한다는 점이 다소 이질적이지만 이것 또한 뚜렷한 박찬욱 감독의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방식
박찬욱의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사랑에 있어서 항상 숙맥이다. 순정은 있지만 감정을 세련되게 표현할 줄 모른다. 등장인물은 모두 성인이지만 첫사랑처럼 서투르다. 해준은 서래에게 한눈에 반했고 그녀를 위해 고급 초밥을 주문하는 것으로 호감을 표시한다. 그녀 대신 칫솔에 치약을 짜주고 저녁식사로 아이스크림을 먹는 서래를 위해 볶음밥을 만들어준다. 함께 우산을 썼지만 혼자만 흠뻑 젖은 옷이, 그녀를 만나온 날을 숫자로 헤아리는 모습이 그렇다. 한편으로는 박찬욱 자신이 여전히 <소나기> 같은 사랑을 동경하거나 이런 낭만적인 정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상대의 립밤을 서로 나눠 바른다던지 사탕을 입에 물고 키스를 하는 씬이 그랬고 서래와 가까이 있을 때 신발끈이 풀린 이유도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는 않지만 곁에 머물러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 해준도 서래도 그렇게 적극적인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헤어질 결심>은 스토리 상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결정적 증거인 휴대폰을 그녀에게 돌려주며 아무도 찾지 못하게 깊은 바다에 버리라고 말한다. 서래가 원하던 대로 사건을 종결하는 것이 그가 사랑을 증명한 방식이다. 2부에서는 뒤늦게 해준을 사랑하게 된 서래가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고자 애쓴다. 그녀는 이포로 해준을 찾아간다. 하지만 해준은 그런 서래를 보고 자꾸만 “왜 왔느냐”며 추궁한다. 상처받은 서래는 그래서 해준이 원하는 것을 하기로 한다. 좀 더 치밀하게 완전범죄를 만들 수 있었으면서도 피를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해준을 위해 수영장 바닥을 청소하고 그에게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마지막 헤어질 결심을 한다.
-헤어질 결심
해준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제 자리에서 제 각도를 지키고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소지품이 원래의 자리에 들어 있는 맞춤 코트를 입고 정안과 완전 안전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머릿속이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순간에도 성실하게 섹스를 하고 저린 팔을 꼼지락 거리며 팔베개를 해주는 남자였다. 서래를 사랑하게 되었으면서도 “난 깨끗해요”라고 자신하던 해준은 서래가 남편을 죽인 진범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사정없이 흐트러진다. 형사로서의 자부심을 잃고 스스로 붕괴되었음을 인정함으로써 헤어짐을 선언한다.
서래는 호미산에서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유골을 뿌리고 해준의 미결 사건이 되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살인사건이 해결되기 직전에 바다로 향한다. 휴대폰을 바다에 버리는 대신 스스로를 바다에 버린다. 까마귀를 묻을 때처럼 양동이를 들고 모래를 파서 산을 만들고 스스로 깊은 바다에 빠져 아무도 못 찾게 한다. 그녀가 진짜 죽었는지 아니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 누구도 찾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래는 세상과 작별하고 해준의 벽에 영원히 남기를 선택한 것이다.
앞서 <헤어질 결심>이 박찬욱 감독의 민낯이 될 수 있었다, 고 표현한 이유는 말 그대로 힘을 뺀 작품이기 때문이다. 전작에 비해 섹스도 없고 폭력도 없지만 그래서 오롯이 감정에 집중할 수 있는 영화였다. 다만 완전히 민낯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과한 세트 디자인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 박찬욱 감독이 찍은 영화에서 류성희 미술감독이나 독특하고 화려한 패턴의 벽지로 대표되는 분위기를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헤어질 결심>은 전작들과는 다르다. 감정이 중요하기 때문에 굳이 화려한 세트로 눈을 돌릴 이유가 없고 ‘안개’가 주요 소재이니 만큼 색이 다양하게 들어가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사방이 과하다. 주인공들의 집은 직업이나 처한 상황에 맞지 않게 투머치 하며 마치 인테리어 전시장 같은 분위기마저 풍긴다. 해준이 혼자 사는 집 거실에 반듯하고 빼곡하게 정리된 LP들이 정말 이 영화의 서사에 어울리는 소품이었을까? 서래의 집 또한 모든 요소가 과잉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의자 하나 유골함을 싼 보자기 하나까지 튀지 않는 것이 없다. 경찰서 세트는 또 어떠한가. 이것이 박찬욱 스타일이라고 퉁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일까. 아무리 개인적인 미감을 포기할 수 없더라도 영화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다면 과감히 포기하는 것도 연출의 한 부분이다.
심지어 박찬욱 감독은 전작들에 비해 절제하려고 했다는 인상을 풍기기에 더 아쉬움이 남는다. 실제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극적인 요소를 뺀 작품으로 칸영화제 상을 받았다고 특별히 다른 감흥이 있는 건 없다. 그냥 좀 고전적이고 우아한, 순수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순수하다고 해서 동심으로 돌아가는 얘기를 말하는 건 아니다. 정치적 메시지나 감독의 주장 등을 포함하지 않는, 그리고 영화적으로 화려한 볼거리나 기교가 없길 바랐다"며 "영화를 구성하는 최소의 요소를 가지고 간결하게 구사해서 끌어내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잘 모르겠다. 너무 구식으로 보일 수도 있겠고, 반대로 현대에는 이런 영화가 더 새로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무리 알맹이가 순수한들 포장이 과하면 이질감이 생긴다.
이런 이유로 영화의 전체적인 미장센보다는 대사에서 감독의 의도가 잘 느껴진다.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하지 않고 다른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 우아하고 고상한 느낌을 준다. 오히려 번역기를 사용한 소통 덕분에 두 사람의 대화가 문어체에 가까워져서 더 고풍스러워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박찬욱 감독이 만약 연출 외적인 부분에서 힘을 조금만 더 뺐다면 어땠을까. 물론 어떤 이들은 이런 요소들이 <헤어질 결심>의 매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게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여전히 화려한 배경이 너무 아쉽다. 나야말로, 설사 그것이 구식이라 하더라도 박찬욱의 순수한 영화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짧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박해일의 연기에 대해서다. 무엇보다 분위기가 중요한 이 영화에서 박해일의 눈은 정말 아름다웠다. 박해일은 해준이 서래를 처음 만났을 때 한눈에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너무나 설득력 있게 만들어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장면에서 그의 눈은 그때그때 필요한 모든 감정을 담아낸다.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분명 새로운 시도다. 다음엔 이전처럼 화려한 볼거리로 중무장한 영화를 만들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더욱 이 영화가 특별해질 것이다. 감독은 천만 관객을 동원할 상업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엔 실패로 끝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한 번 더 도전해주었으면 좋겠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엔 유머가 있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이 있다. 그러니까 좀 더 힘을 빼고 온전히 이야기의 힘으로 다음을 노려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