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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퍼민트 Mar 24. 2024

철없이 살아가는  마흔 중반

묘안이 떠오르지  않을 땐 이성을 살짝 놓아보기도...

  맘이 조금 힘들었던 날은  주저리주저리 떠들고파진다. 오늘이 그런 날인 듯 ㅋ



  거의 2년만에 자낙스에 손을 댄 오늘.  약에도 유통기한이 있을텐데 털털한 성격(오늘은 아주 나를 엄청 미화시키는구나. 털털...! ㅋ)으로 그런 숫자 따위는 가볍게 패스하고 복용. 어찌어찌 교회에 가서 식구분들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직장 선배이자 같은 교회 집사님인 W에게  오늘의 약물 부작용(심한 졸림) 에피소드를 영웅담처럼 내놓는다. 왜 W선배님 앞에선 내 치부까지도 다 드러내놓게 되는지, 약을 먹게 된 이유까지 미주알 고주알 다 뱉어낸다.



  그러고  보니, 힘들 땐 항상 곁엔 W선배님이 있었다.  작년 어느 날인가 잔소리를 좀 했더니 결국 남편의 예전 버릇이 나와버렸다. 동굴로 들어가버리기. 큰일이었다. 한번 시작되면 3개월은 각오해야 한다. 신혼 때부터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면서 내 마음의  우울이 깊어졌었다. 다행히 내 나이 마흔을 앞두고, 결혼 15년쯤 되어가는 어느 해인가 나도 남편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서로의 마음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털어놓으며 가정이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런데 몇 년 만에 다시 그가 화가 난다는 이유로 묵언수행과 상대를 투명인간 취급하기라는 그 무기를 다시 꺼내든 것이다. 며칠을 그렇게 보내다가  피가 마르는 듯 하여 나도 무기를 꺼내들었다. 숨어버리기! 예전엔 술먹고 새벽에 들어오는 남편을 혼쭐 내주려 마치 집 나가버린 것처럼 해놓고는 은밀한 곳에 숨고는 했었다. 집안 구석구석을 다니며 아내를 찾고 꺼져있는 아내의 전화기에 계속 전화를 하다가 결국 지칠 때쯤 옷장이나 침대 아래에서 아내가 나오면, 귀신 본 것 같이 깜짝 놀라는 그의 얼굴이라니...  이번엔  좀더 강한 무기를 사용하기로 했다. 진짜 집 나가기!


   그렇게 아내를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방문 잠그고 사는 남편에 대한 최대의 복수, 바로  집을 나가는 것이다. 집 근처에 깨끗한 호텔을 검색해 다음날 출근할 준비까지 해  차를 끌고 나선다. 낮에 직장에서 W선배님께 이런 계획을 말씀드렸었는데 마침 객실  문을 열 때쯤 그녀가 전화를 한다. "선배님, 저 도착..앗!"  도착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려다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문을 열자마자 벽을 타고 들려오는 어느 여인의 교성에 앗차 싶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현실 앞에서 우린 휴대폰을 들고 아무말도 못하고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래서, 이런 충격요법의 결과는 어땠냐고? 남편은 이미 아내의 숨기 전략에 단단히 적응된 사람이며, 그보다도 그날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아내가 없는 줄도 몰랐던 듯 하다. 결국 남편 승리. 선배님 조언대로 그냥 다음날 대화를 시도해 남편을 동굴에서 빼냈다. 함께 산 세월이 길어서인가, 예전보다 많이 쉬워지긴 했다.


  오늘은 약을 먹고 고생해서인지 남편과 함께 걷고 싶었다. 그냥 곁에만 있어도 좋을 듯 했다. 그러나 쉰에 골프맛을 알게 된 남편은 각종 애교를 구사하며 스크린골프장에서 골프 연습을 하게 해달라고 했다. 오전에도 실컷 하더니 저녁시간에도 하겠다는... 내 상태를  가볍게 받아들인 그는 그렇게 골프연습을 했다. 그새 남아있는 약 기운인지, 지난 한주의 긴장과 피로 때문인지 기절하듯  몇 시간을 내리 자고 깼는데도 남편이 없자, 약도 오르고 장난기도 발동하고 무엇보다 내 상태에 대한 경각심을 알리고  싶었다. 살짝 더 남은 졸음에 다시 누우며 약 이름과 '필요시 복용'이라는 문구가 쓰여진 약통을 오른손에 쥐었다. 이 정도면 눈치채겠지. 다시 잠이 들려는데 그가 왔다. 좀 늦었다며 다리를 흔들어 깨운다. 미동도 하지 말자. 얼굴을 살핀다. 표정 조심하자. 그런데  이 남자, 내  손은 들여다볼 생각이 없다. 제발 좀 이 손의 하얀 약통을 보라고!!!!  결국, 오늘도 그의 승리다.


  여전히 나는 언제 내게 들이댈지  모르는 가혹한 잣대를 맘 속에 시한폭탄처럼 두고 있다. 그래도 크게 겁나지 않는 건, 맘의 아픔을 나눌 이가 있고, 내 예민함을 더이상 무기로 삼을 수 없게 하는 남편의 무딤이 있고, 어둠을 조금 걷어내고 나면  에너지와 밝음이 그 아래 존재하고 있는 내 내면 상태를 잘 알고있고, 무엇보다도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유치찬란한 연기와 쇼에  남편이 놀라는 것 대신 내 자신이 힐링되는 효과를 얻은 듯하기 때문이다. 살아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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