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기본이고, 상대방을 찰떡같이 이해하는 통찰력이 진짜 핵심
통역은 언어 이상으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꾸준한 역량이 필요하며, 그 이해에 기반해 정확하고 안정적으로 클라이언트의 메시지를 도착어로 내는 것이 ‘잘하는 통역’이자 통역이 어려운 이유의 핵심이다.
통역사는 언어전문가가 아닌 이해전문가입니다. 언어의 장벽을 해결하려면 결국 다른 소통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솔루션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통역사라는 직업도 상당히 난해합니다. 그럼 통역사로서 이해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를 토대로 소통 전반에 대한 인사이트도 얻을 수 있을까요? 현장에서 얻은 경험과 고민을 정리해서 야매통역사만의 야매 이론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Interpreting is actually easy, but no profession is easy
통역, 사실 쉽습니다. 인류는 너무나도 많은 언어를 가지고 있어서 통역에 대한 니즈가 크고, 두 개 이상의 언어를 한다면 누구라도 통역으로서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냥 듣고, 저쪽에서 무슨 말 (출발어)을 했는지 이쪽 말 (도착어)로 설명하면 됩니다.
하지만 누구라도 소통을 할 수 있지만 대변인, 기자, 아나운서, 협상가 등 소통의 전문가들이 육성되는 것처럼 통역도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전문 통역사로 데뷔하고 업계 내에서 경쟁을 해야 합니다. 또한 언어의 장벽을 넘어 글로벌한 파트너십과 솔루션이 개발되려면 정확하고 안정적으로 소통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절실합니다. 누구나 통역을 할 수 있지만, 통역사라면 사명감을 가지고 ‘잘하는 통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잘하는 통역사’와 ‘통역이 어려운 이유’는 같은 말입니다. 어려운 것을 곧잘 해낼 줄 알아야 잘하는 것이니까요. 적어도 AI가 못할 만큼 어려운 걸 잘해야 도태되지 않는 상황이 왔습니다. 반대로 AI가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솔루션을 통해 가치를 제공하는 것, 나아가 AI를 기반으로 사람으로서 차별화를 꾀하는 것 등이 요즘 시대에 통역사뿐만 아니라 그 어떤 직업이라도 살아남기 위한 로직이 아닐까요.
그럼 잘하는 통역이 되려면 어떤 역량을 갖춰야 할까요? 동전의 양면인 질문이지만, 통역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무엇이고, 이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략적으로 ‘잘하는 통역사’의 정의를 읊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발화자의 메시지를 언어의 장벽 너머의 청취자에게 정확하고 안정적으로 전달해 줄 수 있는 통역사이다.’ 이런 통역사가 된다면 AI의 위협뿐만이 아니라 치열한 업계 경쟁에서 살아남고 클라이언트들에게 인정받는 통역사가 될 것입니다.
이 정의를 조금 더 파헤쳐 보겠습니다. 통역하면 흔히 언어의 장벽을 극복할 수 있는 언어능력을 강조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건 통역사의 가장 보편적인 역량이지 핵심역량이 아닙니다. 반대로, 일정 수준의 언어역량이 없다면 애초에 통역사로서 성립하지 않겠죠. 대다수가 두 개 이상의 언어에서 원어민 급 역량을 뽐내는 통역사 시장에서 언어능력으로 누가 잘하는지, 누가 못하는지 나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더 나아가 언어를 아무리 잘한다고 한들 AI를 이기긴 어렵습니다. 일단 AI는 대부분 언어를 다 할 수 있으니까요. 피곤해하지도 않고 중간중간에 물을 마실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예술의 경지에 이른 언어능력을 보이는 통역사들도 있습니다. 저는 명함도 내밀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남의 말을 옮기는 서비스기 때문에 아무리 언어의 예술 가고 마법사라고 한들 뽐내는 의미도 덜합니다. 언어역량은 '잘하는 통역사'로서 차별화 포인트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핵심은 ‘발화자의 메시지를 … 정확하고 안정적으로 전달’하는 역량입니다. 유명 통역사 회고록, 유튜브 등을 보면 '센스 있는 통역, ' ’ 의도를 잘 파악하는 통역,‘ ‘직역하지 않고 적절히 의역하는 통역’ 등의 언급이 자주 나오는데, 일맥상통하는 포인트입니다. 통역사를 좀 써 본 클라이언트들도 ‘통역은 언어만 잘해서는 안된다’고 거들곤 합니다.
그런데 너무 두루뭉술합니다. 기본적으로 관련 분야에 대한 철저한 사전준비를 해야 행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는 합니다만, 클라이언트가 배경조사 내에서 얘기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메시지를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한다는 관점에선 배경조사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해답은 ‘짬’입니다. 다시 말해, 대부분 통역사들은 노하우를 축적하여 통역의 ‘알잘딱깔센’ 영역을 공략합니다. 대표적으로 국제회의 급의 동시통역사들은 끊임없이 통역을 하는 동시에 번뜩이는 표현을 개발해 내고, 발화자의 실수도 커버하는 등 가공할 만한 멀티태스킹을 장착합니다. 또 저와 같이 특정인물을 전담하는 수행통역은 해당 인물의 스타일과 선호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축적해서 소위 "접신"하는 통역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특정 업계 경험을 쌓으며 특화되어 누구보다도 업계 최신 현황에 대해 꿰고 있는 통역사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통역을 시작했던 공군에서 군수와 전력, 획득 등의 분야를 담당하는 통역장교들은 주요한 방산업계 이슈에 대해 빠삭하게 파악해 놓고 네트워크까지 구축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잘해야 기회를 얻는 통역사 시장의 특성상 고품질의 경험을 축적했다는 것은 잘하는 통역이고, 성공한 통역입니다. 잘하면 잘한다는 얘기를 길게 늘어놓은 셈인 것이죠. 해답이 아니진 않지만 잘하는 통역에 대한 노하우, 그중 이해력에 대한 노하우는 실제로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해결해주지 못했습니다. 사실 통역사들끼리 ‘잘하는 통역’에 대한 노하우를 공유하는 관점에서도 애로사항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막연하게 언어를 수련하고, ‘알잘딱깔센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노트패드를 든 초보 통역인 제게 현장은 너무나 와일드했습니다. 만찬자리에서 막걸리가 오가는데 ‘막걸리는요, 막 걸러서 막걸리입니다. 하하하!’ 말씀하시곤 뒤 돌아 기대에 찬 눈빛으로 쳐다보신 클라이언트. 회의 준비로 이틀 밤을 새우시고 회의장에서 횡설수설 발표 후 ‘좀 어렵게 말씀드렸지만 통역사가 잘 전달해 주리라 믿는다’고 과분한 신뢰를 주신 클라이언트. 협상이 안 풀리자 육두문자를 날리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간 클라이언트.
아무리 당황스러운 상황이어도 통역사의 입장에서 최악의 상황은 아무 Output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통역을 하다가 드는 최악의 기분은 듣자마자 '아니 저걸 어떻게 통역하지' 하는 혼란함입니다. 배가 쑥 꺼지면서 머리는 띵한 그런 기분이랄까요.
그럼에도 어떻게든 해석해서 도착어로 내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경험이 부족하다면 아예 산으로 갈 수도 있고,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현장에서 교체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발화자의 메시지를 철저히 이해해서 이를 기반으로 딜리버리 하는 역량이 단연코 가장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역량을 키우고 공유할지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통역은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