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쁜 토끼 Feb 17. 2023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

사토 겐타로



아무 정보 없이 서점에 가서 표지만 보고 책을 고르다 보면 십중팔구 실패하게 되는 요소들이 있다. 


첫째로 제목에 숫자가 들어가는 것들이다. '~하는 5가지 방법', '~하는 10가지 사건'과 같은 제목이 붙은 책들은 대개 첫 1, 2번째만 흥미롭고 뒤로 갈수록 억지로 리스트를 채워 넣은 느낌이 난다. 억지로 채워 넣은 내용인 만큼 읽는 사람도 참 고역스럽다. 결국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책의 내용들은 다 휘발되어 버리고 머릿속엔 '이런 책이 있었다'라는 흔적만 남는다. 두 번째는 일본작가의 책이다. 이 경우는 작가의 문제라기보다는 일어 문장을 번역했을 때의 특유의 문체 때문이니 번역의 문제라 할 수 있지만, 어찌 됐건 집중이 안되고 읽기 불편한 건 사실이다.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은 이 두 가지에 모두 해당되는 책이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안 골랐을 책이지만 나도 모르게, 표지의 색감이 너무 좋아서, 고르게 되었다. 그리고 예상과는 달리 꽤나 재미있게 읽었다.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 

제목대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질병들로부터 인류를 구원해 낸 10가지 약을 소개한다. 영향력 순이 아니고 역사에 등장한 시간 순으로 소개를 하기 때문에 읽다 보면 인류의 처절한 극복의 역사를 보는 듯하다. 인터스텔라의 '인류는 언제나 그랬듯 답을 찾아낼 것이다'라는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수백 년 동안 뱃사람을 괴롭혀왔던 괴혈병을 치료하기 위해 부두술과 같은 주술적 힘을 빌리던 게 불과 2-300년 전 일이다. 과학의 발달로 세균과 바이러스라는 병의 근원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인류가 반격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바이러스도 변이를 통해 인류를 위협하지만 그때마다 인류는 새로운 약을 찾아내고야 만다. 


역경과 극복. 역병과의 싸움은 나를 '인류'라는 거대한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끼게 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떤 역사적 사실도 이런 광범위한 공동체에 나를 집어넣을 수 없을 것이다. 대개 역사는 지역이나 문화 공동체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마치 외계인이 지구에 쳐들어와 인류가 위기에 처했을 때 비로소 '인류의 하나인 나'를 인식하게 되는 것처럼, 이 책에서 나오는 질병이라는 공동의 적이 나에게 소속감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느낌이 마치 영웅 소설을 읽는 것 같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책을 읽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다 읽는데 몇 시간이 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책에선 10가지 약의 개발자들이 나온다. 당시 질병으로 인해 고통받던 상황과 그들이 약을 개발하게 된 경위, 그 후 파장들을 이야기하는데 읽다 보면 자꾸 영웅들의 메인 스토리보다는 그 저변에 관심이 쏠린다. 인류를 구원하는 건 특출 난 개개인의 능력인가. 아니다. 그들은 임계치에 도달한 인류의 마지막 모래알이다. 질병을 극복하기 위한 모든 분야에서의 저변이 갖춰졌을 때 비로소 그들의 능력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비록 스폿라이트는 극소수가 받지만 결국 이건 인류 공동의 재난 극복 스토리이다. 새삼 지식의 축적이야말로 동물과 인간을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아쉬운 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책의 주제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이 가슴 웅장한 역경 극복의 서사를 지엽적인 일화 중심으로 설명하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또 인류 승리의 전과가 자세하게 나와야 할 때에 두루뭉술하게 '많은 것을 얻었다'라는 식으로 넘기는 것이 허다하다. 최고로 고양됐을 때 수치 자료가 빠지니 맥이 풀려버린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일본인의 우수한 성과는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의 진위를 의심케 만든다. 진짜 비중 있는 일을 한 건지 작가가 일본인이기 때문에 들어간 건지 알 수야 없지만 '일본인'이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건 분명해 보인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지금의 위생관을 쌓기 위해 수천 년이 걸렸으며 수억 명이 죽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의학들은 모두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시행착오를 거쳐 쌓아 온 지식의 결과이다. 역경이 찾아오면 극복하려 노력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로 저변이 쌓이면 임계점을 뚫고 한층 더 단단해진다. 결국 생존력이 올라간다. 참 경이로운 과정이다. 무심코 삼키는 알약 하나에 이러한 경이로움이 담겨있다. 간단해 보이는 약 하나하나가 수천 년의 역사를 품고 있다. 지금도 인류의 생존에 기여하고 있을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작가의 이전글 채식주의자 - 한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